미국의 ‘임명식’ 주권이양 앞두고 종족간 갈등 · 저항세력 공격 고조되는 이라크
“이라크인들은 지금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20일 의회에서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 이 시각에도 용감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억압받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폭압적인 정권에 정의의 심판을 내림으로써 미국은 더 안전해지고 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특권을 누리던 극소수 수니파가 주도하고 있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세는 결국 실패할 것이다.” 미군 병사들의 ‘용맹성’을 의심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점령군 탱크가 거리를 질주하고 언제 어디서든 총탄이 날아오거나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져다준 것은 희망보다 공포에 가까울 것 같다. 폭압적인 정권에 대한 정의의 심판 역시 이슬람권에서 유례없이 극에 이른 반미 감정을 새겨보면, 미국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 얻어내지 않으면 기회 없다
부시 대통령의 호언과 달리 이라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불길해진다.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을 생포한 뒤 저항세력의 공세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는 미 점령당국의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살폭탄 공격은 해가 바뀌어도 끊이질 않는다. 종족갈등이라는 낯익은 유령이 이라크 전역에서 배회하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위기감은 어느새 ‘내전’이라는 최악의 전망을 내놓고 있다. 지난 1월22일 뉴스 신디케이트 <나이트-리더>는 전·현직 미 정부 관계자의 말을 따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이라크의 현 상황이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고 전했다. 이런 내용은 이미 이달 중순 백악관에 구두보고까지 된 것으로 전해졌다. 중앙정보국뿐 아니라 중동 전문가들이 다수 포진한 국무부는 물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까지 이라크에서 내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긴장하기는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부는 이달 초 “이라크의 종족갈등이 격화할 경우, 자칫 강제적 영토 분할로 이어질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터키·시리아·이란 등 쿠르드족이 흩어져 살고 있는 주변국들도 앞다퉈 “이라크는 단일국가로 남아야 한다. 쿠르드족이 독립국가를 선포하는 건 좌시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이라크에서 내전이 벌어진다면, 주변국의 개입은 피할 수 없다.
내전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아연 힘을 받는 것은 그동안 미국의 점령정책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던 이라크 내 각 종족·정파가 주권이양 시기가 다가오면서 앞다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탓이다. 이라크 전체 인구의 약 60%인 15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시아파는 직접선거를 통한 임시정부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적극적으로 거들었던 쿠르드족도 자치권 확대와 원유이권 배분을 원하고 있다. 후세인 정권 시절 특권층으로 군림해온 수니파 역시 점령 초기 숨죽이던 모습에서 탈피해 전국적 조직을 건설하는 등 세력을 모으고 있다. 지금 뭔가를 얻어내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다급함이 이들 모두를 옥죄고 있다.
갈등의 핵, 키르쿠크
지난 1월19일 바그다드 시내 중심가에선 10만여명의 시아파가 운집한 가운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미 점령당국은 불안한 치안 상황과 선거법 부재, 선거인 명부 작성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피하고 있는 조기 직접선거를 촉구하기 위한 압박이었다. 미국에 비협조적일 가능성이 높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 때문에 점령당국이 직접선거를 피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시아파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알 시스타니는 10만 시위를 이끌어낸 뒤 대리인을 통해 밝힌 성명에서 “이라크인들은 직접선거를 통한 민주적인 정치 시스템과 정의·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헌법을 원한다. (미국이) 이런 요구를 거부할 경우, 전국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미국이 추진하는 계획대로라면, 오는 6월30일까지 이라크 주권이양 준비작업을 마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 18개 주에서 특별위원회가 꾸려지고, 이들 위원회가 각 주를 대표할 선거인단을 임명해야 한다. 이렇게 뽑힌 선거인단은 다시 임시의회 의원을 임명하고, 임명된 의원들이 최종적으로 임시정부 수반과 각료를 임명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오는 7월1일 이라크 주권을 임시정부에 넘기겠다는 게 미국이 밝힌 일정표다. 이렇게 구성될 임시정부는 오는 2005년 말 총선을 실시하기 전까지 약 17개월을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이라크를 통치하게 된다.
이를 두고 ‘신세대 촘스키’로 불리는 저명한 칼럼니스트 나오미 클라인은 지난 1월22일 캐나다 <글로브앤메일>에 보낸 기고문에서 ‘임명된 자들에 의한 통치’(Appointocracy)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 대법원에 의해 ‘임명’된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폴 브리머 이라크 최고행정관이, 임명에 임명을 거쳐 임명된 임시정부에 이라크 주권을 이양하면,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전통을 만들어내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침공 초기부터 친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쿠르드족 역시 최근 들어 미국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마수드 바르자니 쿠르드민주당(KDP) 당수는 최근 영국 <인디펜던트>와의 회견에서 “(미국으로부터) 1974년 후세인 정권과 합의한 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자치권을 제안받았을 뿐”이라고 분개했다. 지난 1991년 이른바 ‘비행금지구역’이 선포된 뒤 후세인 정권이 쿠르드 자치지구에서 물러나면서, 10여년 동안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려왔던 쿠르드족은 현재 원유의 보고인 키르쿠크를 포함한 북부지역의 영토에 대해 자치권을 요구하고 있다.
쿠르드족의 이런 움직임은 다른 종족의 반발과 뒤엉켜 한국군 추가 파병지로 결정된 ‘북부 원유지대의 심장부’ 키르쿠크에서 위기감을 높이고 있다. 1923년 유전이 최초로 발견된 뒤 키르쿠크에는 알려진 세계 원유매장량의 6.7%가 몰려 있다는 게 업계의 추산이고 보면, 키르쿠크를 둘러싼 각 종족의 기득권 다툼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라크에 협력하는 자도 공격 목표”
아랍계와 투르크멘, 쿠르드족 등 키르쿠크의 3대 종족은 저마다 자신들이 80만 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공식 인구조사는 1957년 실시된 뒤 반세기 가까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종족도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오는 6월로 예정된 인구조사를 앞두고 각 종족을 대표하는 정치단체들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1970년대 후세인 정권의 아랍화 정책에 따라 키르쿠크에서 쫓겨났던 쿠르드족·투르크멘 등 3만여명이 귀환을 시도할 경우 불거질 종족갈등은 쉽사리 폭력화할 수 있다.
지난 1월24일 이라크 치안상황 조사를 위해 유엔 조사단이 현지를 방문한 지 하루 만에 바그다드 안팎에서 저항세력의 공격이 집중되면서 미군 5명과 이라크인 4명이 숨졌다. 바그다드·칼디야·사마라 등 이른바 ‘수니파 삼각지대’ 3곳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 이날 공세로 지난해 3월 미국 주도의 이라크전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숨진 미군 병사는 모두 512명으로 늘어났다.
앞서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생포 뒤 저항세력의 공세가 급격히 줄고 있다는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1월18일 아침 일찍 바그다드 미 점령당국 사령부 출입문 앞에서도 강력한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져 20여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다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미군에 고용됐거나, 미군기지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방문한 이라크인들이었다. ‘점령군에 협력하는 세력도 공격목표’라던 저항세력의 공언은 그렇게 비참한 현실이 됐다. 바그다드에 폭격이 퍼부어지기 시작한 지 10개월째, 침공 이전에 우려했던 일들이 하나둘씩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정인환 기자/ 한겨레 국제부 inhwan@hani.co.kr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20일 의회에서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 이 시각에도 용감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 세계 각지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억압받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폭압적인 정권에 정의의 심판을 내림으로써 미국은 더 안전해지고 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특권을 누리던 극소수 수니파가 주도하고 있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세는 결국 실패할 것이다.” 미군 병사들의 ‘용맹성’을 의심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점령군 탱크가 거리를 질주하고 언제 어디서든 총탄이 날아오거나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져다준 것은 희망보다 공포에 가까울 것 같다. 폭압적인 정권에 대한 정의의 심판 역시 이슬람권에서 유례없이 극에 이른 반미 감정을 새겨보면, 미국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2003년 11월15일 미군 탱크에 치여 사망한 이라크인 희생자와 오열하는 그의 가족. 부시 대통령의 호언과 달리 이라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불길해진다.(SYGMA)
부시 대통령의 호언과 달리 이라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불길해진다.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을 생포한 뒤 저항세력의 공세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는 미 점령당국의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살폭탄 공격은 해가 바뀌어도 끊이질 않는다. 종족갈등이라는 낯익은 유령이 이라크 전역에서 배회하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위기감은 어느새 ‘내전’이라는 최악의 전망을 내놓고 있다. 지난 1월22일 뉴스 신디케이트 <나이트-리더>는 전·현직 미 정부 관계자의 말을 따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이라크의 현 상황이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고 전했다. 이런 내용은 이미 이달 중순 백악관에 구두보고까지 된 것으로 전해졌다. 중앙정보국뿐 아니라 중동 전문가들이 다수 포진한 국무부는 물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까지 이라크에서 내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18일 이라크인들이 바그다드의 미 점령당국 사령부 출입문 앞에서 벌어진 자살폭탄 공격으로 깨진 창문을 내다보고 있다.(AP연합)

키르쿠크의 한 유전에서 작업하고 있는 이라크 노동자. 한국군 추가 파병지로 결정된 ‘북부 원유지대의 심장부’ 키르쿠크는 종족갈등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SYGMA)

2003년 12월6일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오른쪽)이 키르쿠크 행정 책임자들을 만나고 있다.(GAM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