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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라크와 아프간, 두개의 전쟁] 아, ‘실패한 국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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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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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점령 뒤 더욱 황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을 새 헌법이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아프가니스탄에 더 이상 내전이 없기를…. 신이시여, 우리에게 단결의 힘을 주소서.”
늙은 율법학자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장내를 가득 메운 502명의 부족대표들은 숙연한 채 고개를 숙였다. 지난 1월4일 아프간 수도 카불기술대학에 마련된 대형 천막 안에서 새로운 역사가 씌었다. 아프간 부족대표회의(로야 지르가)는 이날 22일에 걸친 격렬한 논쟁을 마감하고 강력한 대통령제를 정체로, 이슬람공화국을 국체로 하는 새 국가 건설의 이정표를 완성했다(상자기사 참조). ‘합의’를 상징하는 30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부족대표회의 시브카툴라 무자디디 의장은 아프가니스탄의 새 헌법이 통과됐음을 공식 선포했다. 30여년에 걸쳐 전쟁의 참화를 견뎌온 분쟁의 땅에 마침내 뿌려진 변화의 씨앗은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지난해 12월15일 새 헌법을 논의하기 위해 부족대표회의에 참석한 아프간 부족대표들. 마침내 지난 1월4일 강력한 대통령제를 채택한 새 헌법이 통과됐다.

다시 득세한 탈레반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땅. 사람들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흔히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른다. 상대적으로 은 기간에 병력 손실도 소규모였던 탓인지, 조지 부시 행정부는 아프간에서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기 바쁘게 사담 후세인 정권 제거를 위한 준비를 재촉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면서, 아프간은 차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전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 올라 ‘승리’를 선언한 지난해 5월1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과 나란히 선 채 “아프간에서도 주요 전투는 끝났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미군은 아프간에서도 게릴라식 공격을 퍼부은 뒤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부 산악지대로 사라져버린 탈레반 잔존세력과 맞서고 있다.

이라크에서 저항세력의 파상 공세에 시달리는 미군이 ‘베트남의 악몽’을 떠올릴 즈음, 아프간은 서서히 이라크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차량 자살폭탄 공격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거리에 폭탄이 매설됐다. 원격장치를 이용한 폭탄공격이 유행처럼 번졌고, 전투 현장이 아닌데도 이동식 로켓이 버젓이 동원됐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원조기구 요원들이 공격의 목표물이 되는 현상도 이라크와 맥이 닿아 있다.

탈레반이 패퇴한 뒤 아프간에 파견된 다국적군은 수도 카불 인근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지방에선 치안 확보를 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카르자이 정부는 ‘카불 정부’라는 비아냥이 난무하는 사이, 북부동맹군의 카불 입성과 함께 자취를 감췄던 탈레반은 서서히 세력을 넓히고 있다. 이미 자불과 오루즈간 등 아프간 남부지역 상당수는 탈레반 영향권 아래에 넘어갔으며, 칸다하르 등에서도 탈레반이 득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12월12일 미군 폭격으로 부상당한 아프간 소년. 미국은 아프간 주둔비로 연간 110억달러씩을 쏟아부었지만, 같은 기간 재건에 투자된 예산은 9억달러에 그쳤다.
부시 행정부의 아프간 특사 잘말 칼릴자드의 말대로, 치안이 불안하면 모든 것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치안 유지 없이는 재건도 있을 수 없다.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최근호에서 “세력을 급속히 회복하고 있는 탈레반의 최대 자금원은 여전히 알카에다”라고 지적했다. 이를 차단하지 못하는 한 치안 유지는 물론 본격적인 전후 복구사업도 어려울 전망이다.

지난 2년여 동안 미국은 아프간 주둔비로 연간 110억달러씩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아프간 재건에 투자된 예산은 9억달러에 그쳤다. 지난해 말 미 랜드연구소가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아프간이 ‘잊혀진 땅’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보스니아와 코소보 등 유럽의 분쟁지역에 파견된 평화유지군이 인구 1천명당 각각 18.6명과 20명에 이른 것과는 달리, 아프간에 파견된 4800명의 평화유지군은 1천명당 0.2명선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미군으로 구성된 1만1500명의 전투병력을 포함하더라도 치안유지 병력은 1천명당 1명을 넘지 못한다. 무력분쟁 발발 이후 2년 동안 지원된 국제원조도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선 1인당 각각 1390달러와 814달러에 이르렀지만, 아프간에서는 불과 52달러에 머물렀다.

탈레반의 회복세와 함께 전쟁 직후 주춤했던 아편 재배가 다시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현재 아프간에서 재배되고 있는 아편은 전 세계 생산량의 77%를 차지하는 것으로 지난해 유엔이 내놓은 보고서는 추산했다.

아편 재배도 급속도로 늘어

전통적인 아편 재배지역인 동부와 남부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02년과 2003년 사이에만도 아편 재배면적이 두배 가까이 급증하면서, 탈레반 정권 시절에 비해 생산량이 약 36배나 늘어난 것으로 추산됐다. 미 정부는 아프간 내 아편 경작지는 2001년 1685ha에서, 2002년엔 3만700ha로 급증하더니, 2003년엔 두배 가까이 늘어난 6만1천ha에 이른 것으로 추산한다. 2002년 아프간에서 생산된 아편은 3600t에 이르며, 아프간 국내총생산 44억달러 가운데 절반가량이 아편 재배와 판매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추정된다. 급격히 늘어나는 아편 재배를 통해 마련된 자금은 고스란히 지역 군벌과 탈레반 세력 등에 유입돼 사회불안을 부추기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탈레반이 정권을 되찾으리라고 내다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효과적인 중앙정부 부재와 치안불안이 지속되는 한, 이들 세력의 근절 역시 요원할 것이다. 미국에게 ‘베트남의 악몽’을 되새겨준 이라크와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좌파 게릴라와 거대 마약조직에 휘둘려 끝없는 내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콜롬비아의 중앙아시아판에 가까워지는 건 분명해 보인다. 아프간이 전형적인 ‘실패한 국가’의 길로 접어드는 게 아니냐는 국제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인환 기자/ 한겨레 국제부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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