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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일본] 살아남으라, 평화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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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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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고시마 ‘호헌대회’의 파병 반대 외침… 우익의 민족차별 움직임에 반기를 들다

“보내지 마라, 죽이지 마라, 죽지 마라.”
지난 1월16일 저녁 일본 규슈 남부 가고시마시 도심. 일본 메이지유신 발흥지이기도 한 이 지방도시에서 ‘이라크 파병 반대’ 목소리가 높게 울려퍼졌다. 이날은 일본 자위대 선발대 30여명이 이라크 남부 사마와로 떠난 날이다. 이에 따라 일본 전국 각지에서 제40회 호헌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고시마에 모였던 노조 및 시민단체 간부들이 긴급 집회를 연 것이다.

노조 및 시민단체 간부들로 구성된 평화포럼의 회원들이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자위대 파견, 헌법 개정 현실화

호헌대회는 일본 시민·노동단체 연합체인 ‘평화포럼’이 일본의 평화헌법, 특히 “군대를 두거나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 제9조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해마다 개최한다. 그런데 올해는 대회 첫날 이라크에 자위대 선발대가 파견되는 사태를 맞았다. 일본 자위대가 전투 지역에 파견되는 첫 번째 사례다. 따라서 이번 자위대 파견은 일본 내 우경화에 따른 헌법 개정 움직임이 한 발짝 더 현실화했다는 위기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저녁 6시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지만 가고시마 번화가 덴몬칸 거리 앞에는 집회 참석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라크 파병 반대를 알리는 펼침막을 두른 행사용 승합차를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관련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차례차례 차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라크에 파병된 일본 자위대원들은 이라크인들을 죽일 수도 있고, 이라크인들의 공격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태 속에서 실질적인 ‘죽음의 위험’에 처한 것은 1947년 이후 지켜온 “침략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평화헌법 정신이다.

제40회 호헌대회를 알리는 팸플릿 표지.
그러나 집회를 시작한 지 20여분이 지난 시각, 갑자기 또 다른 스피커 소리가 집회장을 긴장시켰다. “여러분의 집회는 경찰청에 신고하지 않은 불법 집회임을 경고한다.” 가고시마 우익단체가 스피커 차량을 동원해 집회장 주변을 돌면서 집회의 불법성과 이라크 파병의 정당성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조용하던 가고시마 시내는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스피커 소리와 이라크 파병을 찬성하는 또 다른 기계음으로 엉켜버렸다. 그 모습은 헌법 정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본 내 진보세력과 우익세력의 갑론을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이날 오전 호헌대회 개최 장소인 가고시마 시민문화홀에는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2100여명이 훗카이도·도쿄·나고야 등 각 지역 푯말을 앞세우고 넓은 강당에 차례차례 자리를 잡았다. 제40회 호헌대회는 첫날 ‘시민의 평화연대로 전쟁도 차별도 없는 세계를’이라는 주제로 전체 토론회를 연 데 이어, 17일에는 6개의 주제로 나누어 분과회의를 했다. 이어 마지막 18일에 토론 성과를 바탕으로 결의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대회 주최쪽은 전체 토론회의 토론 내용을 빠짐없이 수화로 전달하는 등 ‘차별 없는 세계’를 위해 진행에서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호헌대회에서는 해마다 헌법정신을 해치는 주제 등을 선정해 집중 토론을 벌였는데, 이번 제40회 호헌대회의 최대 관심사는 이라크 파병과 북한 핵 문제다. 이라크 파병 문제가 평화헌법 정신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리고 있는 사안이라면, 북한 핵 문제는 일본의 우경화를 급격히 확산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문제를 일본 우익세력이 어떻게 왜곡하고 활용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현재 호헌 문제에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비국민’이라는 망령이 어슬렁거린다

첫날 토론에서 발제자로 나선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인권기금’의 니시노 류미코 이사장은 지난 1월1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이라크 파견 전 자위대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고이즈미 총리가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찾으면서 이라크에 파견되는 자위대원들과 일본 국민들에게 “만일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이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이다. 국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주려 했다는 것이다.

‘헌법이념의 실현’을 구호로 내건 호헌대회 안내물이 행사장 여기 저기에 붙어 있다. 이번 호헌대회의 최대 관심사는 이라크 파병과 북핵 문제였다.
니시노 이사장은 현재 일본에서 이런 애국심 고취와 맞물려 진행되는 것이 ‘민족차별, 배외주의’라고 분석했다. 니시노 이사장은 그 단적인 예로 ‘비국민’이라는 말이 되살아난 점을 지적했다. 현재 일본 우익세력은 전력 증강의 명분으로 외부의 무력 공격 때 ‘국민’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때 ‘국민’에는 재일 조선인, 재일 중국인 등이 포함되지 않는다. 니시노 이사장은 “이는 유사시 그들에게 협력을 요구하지 않겠지만, 그들을 지켜주지도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라며 “다시 말해 재일 조선인 등에 대한 차별화를 공공연히 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국제볼런티어센터(JVC)의 구마오카 미치야 대표는 이런 우경화의 한 동력으로 북한 문제를 지적했다. 구마오카 대표는 “베트남전이 일어나기 전 미국은 북베트남의 위협을 지나치게 과장해 강조했다”며 “그런 모습을 현재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는 일본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인도적 지원을 위해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 구마오카 대표는 “현재 북한은 국력이 많이 쇠퇴해 남한과 주한미군의 전력에 못 미치고 있으나 이런 사실은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대회 둘쨋날 제1분과 토론 ‘비핵·평화·안전보장’에서도 이라크 파병과 북핵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응이 논의됐다.

주일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벌이는 ‘피스 데포’의 다마키 가즈히코 부대표는 “이라크전과 관련해 전쟁과 군대를 합헌화하고 있는 독일·프랑스 등이 반대해온 반면, 전쟁과 군대를 위헌화하고 있는 일본이 찬성한다는 사실은 기묘함을 넘어 겁이 나는 일”이라고 일본의 우경화 상황을 진단했다. 다마키 부대표는 “현재 일본은 평화헌법으로부터 차츰 멀어지고 있다. 만일 일본이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아시아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제40회 호헌대회는 16일 ‘시민의 평화연대로 전쟁도 차별도 없는 세계’라는 주제로 전체 토론회(위)를 연 데 이어, 17일에는 비핵 · 평화 · 안전보장 등 6개의 주제를 놓고 분과별로 열띤 논의를 벌였다.
일본 릿쿄대학에서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이시자카 고이치 강사는 “북핵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이 일본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고 있다”며 이러한 일본 국민의 정보 편식이 우경화를 키우는 토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 대표적 사례로 납치 문제를 꼽으며, 이에 대한 일본 언론의 지나친 보도가 “납치 문제를 북한과 일본간의 민족적 문제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일제의 조선 지배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한 것이지만, 납치 문제는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없다”며 “그러나 일본 보수 정치인과 언론은 납치 문제에 대해 ‘한 민족에 의한 다른 민족의 납치’라는 논리를 보이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평화연대 구축 결의

이번 호헌대회에서는 참가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가고시마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도쿠다 선생은 “제자들이 국가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남을 살해하거나 자신이 살해당할지 모르는 이라크로 가는 현실이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 일본 우익은 실제 생활에서 군대에 의존하는 영역을 넓힘으로써 ‘평화헌법 개정도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체념하도록 만들려는 것 같다”며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더욱 높여야 할 때”라고 대회 참가 소감을 밝혔다.

대회 마지막 날에는 3일 동안 논의한 내용을 중심으로 결의문을 채택했다. 호헌대회 참가자들은 결의문에서 “전쟁은 최대의 인권침해이고 최대의 환경파괴인데, 일본 보수세력들은 2005년까지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한다”며 “이를 막기 위해 아시아나 일본 각지의 평화·인권·환경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과 평화연대를 구축해나가자”고 결의했다. 대회 참가자 210여명은 대회를 마치고 ‘평화헌법’을 지키고자 하는 불꽃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각 지역의 시민단체나 노조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불꽃들은 각 지역에서 또 다른 불꽃을 만듦으로써 일본 평화헌법을 지키는 든든한 성채가 될 것이다.

가고시마= 글 · 사진 김보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사업국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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