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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폭소는 나의 힘

10월3일 첫 일본 원정 경기 앞둔 국내 인디 프로레슬러들의 꿈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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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22 21:47 수정 : 2016-08-2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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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우종 기자

한쪽 링에서 다른 쪽 링까지 뛰어가는 데 필요한 건 단 세 걸음. 충격 완화를 위해 설치된 바닥의 범퍼가 발걸음에 맞춰 ‘쿵, 쿵’ 요란한 소리를 낸다. 빠른 걸음으로 다른 쪽 링에 달려가 반동을 이용해 다시 원래 링으로 돌아오는 걸음을 반복한다. 훈련의 이름은 로프워크(Rope Walk). 로프의 반동을 이용해 속력을 높여 상대방에게 더 강한 공격을 가하는 기본 기술이다.

꿈의 시작, 즐거운 관객

가로·세로 6m 링 안에 땀방울이 쏟아진다. 앞구르기, 뒤구르기부터 상대방 상체를 잡고 들어올려 링 바닥에 내던지는 보디슬램(Body Slam)까지. 지난 8월6일 찾은 경기도 고양시 프로레슬링피트(PWF·Prowrestling Fit) 연습 현장에서 김남석(32) PWF 대표가 선수들과 훈련하고 있다. PWF는 국내 유일의 인디 프로레슬링 단체.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서 프로레슬링의 유쾌함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

이날 오후 고양시 기온은 34℃. 찌는 더위에 어떻게 훈련하나 싶지만 추운 것보다는 낫다. 낮은 온도에서 몸이 굳으면 훈련할 때 더 위험하다. PWF는 오는 10월3일 첫 일본 원정 경기에 도전한다. 김 대표를 포함해 PWF 소속 선수 6명은 기초 체력 훈련을 하면서 상대 선수의 시합 영상을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이들을 훈련하는 김 대표는 학창 시절 운동에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 공부는 평균을 조금 넘는 정도. 성격은 내성적이었다. 초등학교 때 구청장배 태권도 품세 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중학생 때 잠시 유도를 배운 것이 운동 이력의 전부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았다. 외국 프로레슬러가 멋있게 싸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3만~4만 명의 관객이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프로레슬링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했고 ‘이왕표 체육관’을 알게 돼 찾아갔다. 운동을 좋아하던 내성적인 소년은 데뷔 10년 만에 월드클래스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소속 선수인 김수빈(31)과 엉클(37)도 비슷한 계기를 갖고 있다.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는 그들에게 프로레슬링은 꿈이자 오랜 숙제와도 같다.


김수빈은 PWF 주최 2015년 연습생 오디션 우승자 출신이다. 우승자는 데뷔까지 훈련비용이 면제된다. 중학생 때 이왕표 체육관을 찾아가 두 달 연습했을 뿐, 이후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지만, 프로레슬링 관련 카페에서 오디션 도전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프로레슬링의 매력에 대해 그는 “체격이 작은 사람도 기술로 덩치 큰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라고 말한다. 그의 키는 168cm다. 석 달 전 그는 바리스타 일을 그만뒀다. 당분간 운동에 전념할 생각이다. 링에서 그는 주로 선한 역할을 맡는다. 분명한 캐릭터와 코믹한 스토리라인 구성도 경기 준비 과정의 하나다.

엉클은 주중에 사진관을 운영하고 주말이면 PWF 체육관을 찾아 훈련을 받는다. 대학에서 무도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뒤 회사에 취직했고 7년 전엔 아버지의 사진관을 물려받았다. 경기 사진을 찍어주며 김 대표와 인연을 이어오다 3년 전부터 체육관에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생계를 위한 사진관 일이 안정되면서 ‘더 나이 들기 전에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레슬링에 도전했다. 2014년 평택 코스튬 축제에서 프로선수로 데뷔했지만, 아내와 아이는 주말마다 집을 나서는 그가 단순히 운동하러 가는 줄로만 알고 있다. 아직 가족에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선수들이 받는 시합비는 생계를 유지할 정도가 아니다. 프로레슬링이 인기를 끌고 기반이 잡혀 전업 프로레슬러가 되면 좋겠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프로레슬링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선수들은 생업을 위해 학교 교사 등 다른 일을 한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프로레슬러로서 인정받고 시합할 때 많은 팬에게 사랑받는 것이다.

사비 털어 대회 열다

PWF 소속 엉클과 김수빈이 올해 10월 일본 원정 경기를 앞두고 김남석 대표(오른쪽)와 훈련하고 있다. 정확한 기술만큼이나 경기 내용에 어울리는 표정도 중요하다. 류우종 기자

한국 프로레슬링을 대표하는 메이저 단체로 한국프로레슬링연맹(WWA)이 있다. 그러나 2015년 5월 이왕표 대표의 은퇴 기념 경기 뒤로 WWA 주최 행사가 없었다.

이에 비해 PWF는 작지만 독립적이고 그래서 더 파격적인 ‘인디 레슬링 연맹’을 표방한다. 이들은 2014년부터 매년 ‘인생공격’이라는 제목으로 행사를 열었지만, 번번이 어려움을 겪었다. 대관부터 쉽지 않았다. 다목적 공연장은 대관료가 합리적이었지만 ‘시설 망가뜨리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딴지와 밑도 끝도 없이 ‘안 된다’는 억지가 있었다. ‘인생공격1’을 개최한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은 쉽게 빌릴 수는 있지만 그 비용이 700만~800만원 수준이었다. 처음 열린 ‘인생공격1’의 입장료는 2만~5만원 정도였지만, 관객이 적어 많은 적자를 남겼다. 김 대표가 사비로 적자를 감당했다.

지난해 10월 두 번째 행사인 ‘인생공격2’에서는 미국 메이저 프로레슬링 단체 월드레슬링엔터테인먼트(WWE) 챔피언 출신 맷 사이달과 타이틀매치를 준비했다. 그러나 관객은 200명도 안 됐다. ‘인생공격1’보다 관객 수가 오히려 줄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를 불러와도 왜 흥행이 안 되는지 김 대표는 고민했다.

지난 7월 일본에 다녀오며 해답을 얻었다. 일본의 한 쇼핑센터에서 프로레슬러들이 홍보성 이벤트를 진행하는 것을 보게 됐다. 100여 명 정도가 이를 지나치지 않고 몰입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다!’ 싶은 순간이었다. 알고 지내던 일본 인디 레슬링 단체 랜즈엔드(Land’s End) 대표에게 ‘인생공격3’을 일본에서 열고 싶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랜즈엔드 소속 선수의 참가 약속도 받았다. 랜즈엔드를 통해 DDT(Dramatic Dream Team), 드래곤게이트 등 일본의 다른 인디 레슬링 단체 소속 선수의 참가도 확정지었다. 350석 규모의 일본 도쿄 ‘신키바 퍼스트링’을 대관했다.

제7의 선수, 인형 레슬러 ‘릴디’

지난해 10월3일 경기도 고양시에서 열린 ‘인생공격2’. 인형 레 슬러인 릴디(위쪽), 페이스 페인팅이 특징인 갓몬즈(아래쪽)가 게임을 펼치고 있다. 인디 프로레슬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의 즐거움이다. PWF 제공

일본에는 프로레슬링 잡지 <주간 프로레슬링>이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프로레슬링 뉴스를 1면에 싣기도 한다. 일본의 언론이 일본에서 열리는 PWF의 경기 소식을 다루면 그 파급력이 국내에까지 미치지 않을까 그는 기대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 프로레슬링 단체가 아직도 있느냐’고 묻는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 인디 프로레슬링이 건재하다는 것도 증명하고 싶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김 대표의 일본 생활이 있다. 2004년 열여덟의 나이로 데뷔한 뒤 1년간 한국에서 열린 프로레슬링 경기는 네 차례였다. 시합비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2006년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한 일본 선수의 추천을 받아 찾아간 체육관 대표가 WWE 라이트헤비급 세계 챔피언 다카 미치노쿠였다. 놀라운 인연이었다. 일본에서 4년간 유학하며 6개월은 훈련하고 2개월은 한국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이번 ‘인생공격3’에선 PWF 선수들과 일본 유명 인디 선수들이 대결을 펼친다. 1990년대 초반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 한국 프로레슬링과 달리 일본에선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유지되고 있다.

일본의 메이저 레슬링 단체들은 과거 인기를 기반으로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다. 반면 인디 단체들은 젊은 세대와의 소통이나 새로운 기술 개발 등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하며 시장을 키우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만들어진 일본 인디 단체 DDT와 드래곤게이트는 연매출 200억~300억원을 기록했다. 메이저 단체인 전일본프로레슬링(AJPW·All Japan Pro Wrestling)과 노아(NOAH)보다 매출 규모가 더 크다.

“격투기 선수들은 본인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링에 올라가지만, 프로레슬링 선수들은 관객의 즐거움을 위해 올라갑니다.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코믹한 캐릭터를 보면서 관중이 폭소하면 뿌듯하죠.” 한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격투기와 프로레슬링의 차이점을 묻자 김 대표가 답했다. 한국에서는 프로레슬링이 스포츠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과 미국에선 프로레슬링을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 본다.

일본에서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영역과 손잡고 여러 실험을 벌이고 있다. 디자이너와 협력해 ‘링 위의 패션쇼’도 연다. 화려한 의상이 시합의 중요 요소인 프로레슬링에선 디자이너의 상상력이 개입할 수 있다. 단편영화 감독들과 협업도 가능하다. 프로선수들의 다큐멘터리가 극장에서 상영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경기장을 비쳐주면,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선수들이 실시간으로 시합하는 장면을 중계해주는 식이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경기를 하는 것이 내가 이기고 지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김 대표는 실제로 ‘인형 레슬러’를 도입했다. PWF 소속 정식 선수는 총 7명. 그중 한 명이 인형 레슬러다. 이름은 ‘릴디’다. 선수들이 릴디를 상대로 기술을 걸기도 하고 세컨드 선수의 도움을 받아서 릴디가 상대 선수를 공격하기도 한다. 릴디를 응원하는 팬은 주로 어린이와 여성. 강원도 철원 어린이날 행사와 경기도 평택 코스튬 축제에선 릴디와 사진을 찍으려는 팬이 많았다.

이런 노력은 수시로 이뤄진다. 지난 7월30일 김 대표를 포함한 PWF 소속 선수들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거리 레슬링 경기를 벌였다. 시합 중 한 관객이 “애들 보는데 그렇게 (과격한 기술을) 해?”라고 말했다. 다음 거리 경기에선 과격한 기술을 줄이고 좀더 코믹한 요소를 넣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경기마다 선수들의 느낌과 의견을 나누고 다음 시합에 바로 반영한다. 권위보다 소통을 통해 전문성과 재미를 갖춘 시합을 여는 것이 ‘인디 프로레슬링’의 정체성이자 목표다.

슬럼프를 겪을 때도 있다. 심각한 경제적 위기가 찾아왔을 때다. 1500원짜리 과자를 먹을지 말지조차 고민하는 상황이 되면 ‘평범하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도 한다. 그때마다 동력이 된 건 우상으로 생각하던 선수들의 위로와 격려다. 2004년 잠실실내체육관에서 400명가량의 프로레슬러가 데뷔했다. 김 대표가 데뷔전에서 승리를 거머쥔 날 ‘박치기왕’으로 불리는 고 김일 선생이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잘했다. 열심히 하면 챔피언 레벨 가능성 있다.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조금 힘을 빼고, 인생역전!

김 대표의 링네임은 ‘하비몬즈’. 취미처럼 즐겁게 하자는 것이다. 그는 10월 일본에서 열리는 ‘인생공격3’을 통해 취미처럼 즐겁게 인생을 역전시키고 싶다.

경기 고양=김민지 교육연수생 mgone3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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