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손바닥문학상 열기는 ‘역대급’이었다. 제8회 손바닥문학상 공모전에 예년보다 두 배 이상 많은 300여 편의 작품이 도착했다. 함께 뜨거웠던 촛불집회가 제기한 문제가 손바닥문학상 응모작에도 새겨 있었다. 세월호 참사, 권력 전횡, 청년 실업과 고령화, 감시와 처벌, 혐오와 차별 등 다양한 주제를 담은 작품이 마감 직전까지 쏟아져 들어왔다.
올해 예심에는 <한겨레21> 기자 10여 명이 총출동해 응모작을 나눠 읽었다. 예심에서 추린 32편 작품을 본선에 올렸다. 본심은 외부 인사를 모셨던 예년과 달리, 손바닥문학상 취지에 오래 공감해온 한겨레신문사 기자들이 맡았다.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 신윤동욱 <한겨레21> 지성팀 기자가 심사위원으로 12월7~8일 두 차례 본선 심사회의를 했다. 심사숙고 끝에 이항로씨의 ‘치킨런’이 대상작으로 선정됐고, 김혜인씨의 ‘자작나무 숲의 온도’와 박호연씨의 ‘산청으로 가는 길’이 가작으로 뽑혔다.
‘치킨런’은 실직한 장년의 아들이 거동을 못하는 어머니를 혼자 모셔야 하는 상황을 다룬다. 노모와 함께 쓰러져서, 실직과 함께 벼랑 끝으로 떠밀린 한 가장의 선택을 그린 작품이다. ‘자작나무 숲의 온도’는 적막한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이전과 다른 남북한의 만남, 탈북민과 조우를 다룬다. ‘산청으로 가는 길’은 일대일 연애관계를 넘어선 폴리아모리(Polyamori·다자연애)를 주제 삼았다.
올해의 수상자 면면도 예년과 달랐다. 이항로씨는 현역 군인이고, 김혜인씨는 미국 뉴욕에서 글을 쓰며, 박호연씨는 전북 무주에 귀촌해 살고 있다. 다양한 수상자들의 면모가 10년을 향하는 손바닥문학상에 관심 가지는 이들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시상식은 12월2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8층 대표이사실에서 열렸다. _편집자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아내와 이혼한 지난해 겨울부터 지금의 가을까지 치킨런에서 일하며 깨달은 바 한 가지는 사계의 계절 중 가을이 가장 배달하기 좋은 날씨인 점이다. 신호가 막힘없이 뚫린다. 가을밤의 선선한 기운이 뺨에 닿는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뒤 치킨을 들고 뛰기 시작한다. 고소한 치킨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에 가득 찬다. 도착했다는 알림이 들리고, 문 앞으로 달려간다. 벨을 누르니 정갈한 인상의 여자가 나온다. 여자의 허리춤을 붙잡고 있는 조그만 남자아이가 보인다. 진짜 빨리 오네요. 여자의 손에서 건네진 지폐를 받는다. 꾸벅 인사를 한 뒤 뒤돌아 나온다.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등을 타고 넘어온다. 땅거미의 흔적이 아파트 복도를 수놓는다.
가게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수혁의 모습이 보인다. 허공을 휘젓던 수혁의 시선이 나와 마주친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혁이 꾸벅 인사한다. 수고하셨습니다. 눈으로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간다. 손을 내미는 사장 앞으로 배달비를 건넨다. 주방에 들어갔다 온 사장이 잔뼈로 튀긴 통닭을 쥐어준다. 가게 안을 빠져나온 뒤 집을 향해 걷는다. 가을의 밤공기는 차다. 개미굴같이 이어진 다세대주택 골목이 보인다. 전봇대에 맺힌 불빛은 곧 꺼질 것처럼 깜빡거린다. 건물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간다. 노파의 냄새가 반지하 철제문을 비집고 풍겨나온다. 손에 들린 치킨 또한 온기를 잃은 지 오래다. 문을 열자 고릿한 똥내가 코를 찌른다. 가슴속에 있던 화가 잔뿌리를 뻗치며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보일러를 튼 뒤 노파가 있는 방문을 연다. 누워 있던 노파가 고개 반쪽을 들어 나를 본다. 이내 고개를 떨구는 노파. 방은 노파가 지려놓은 냄새로 가득하다. 여름이 지났지만 노파의 악취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진다. 한구석에 치킨을 던지고 이불을 들춘다. 검붉은 똥물이 기저귀를 비집고 나와 요를 적셨다. 신경질적으로 내복을 벗긴다. 깡마른 노파의 다리 사이로 기저귀가 빠져나간다.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은 헐벗은 거웃이 눈에 들어온다. 초경을 끝낸 소녀의 그것도 노파와 비슷할 것 같다. 전기장판을 빼내고 요를 잡아당긴다. 차가운 방바닥에 맨살이 닿은 노파가 신음을 내뱉는다. 수건으로 노파의 몸 곳곳을 닦는다. 화장실로 가 온수를 튼다. 물 위로 수건을 던지자 검붉은 기운이 빠져나온다. 노파의 미약한 신음이 들린다. 주먹을 다잡는다. 차라리 노파는 정신을 잃고서 어린애가 되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맨정신이 오히려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노파 또한 나의 밑을 닦아주던 시간이 있었을 테다. 밭농사를 마치고 돌아와 내가 지린 똥을 맨손으로 닦아내고, 말려놓은 기저귀 천으로 아랫도리를 감쌌겠지. 배가 고파 울어젖히면, 멍울이 만져지는 가슴을 드러내 젖을 물렸을 테고. 당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작물이 없었던 것처럼 나의 몸 또한 당신의 손길을 타지 않은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해 두해 자라나는 내가 당신의 기쁨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당신은 나에게 그렇지 않다. 깨끗이 쳐내고 싶은 존재일 뿐이다. 나는 당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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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옆구리에서 다리로 이동한다. 눈을 떠 이불을 들추자 무릎 위로 더듬이를 늘어뜨린 바퀴벌레가 보인다. 등허리에서 시작된 소름이 머리를 찌른다. 잡으려고 일어나자 순식간에 방구석에 있는 장롱 틈으로 숨는다. 어둠에 잠긴 단칸방이 보인다. 곰팡이가 핀 벽은 박제된 화석 같다. 꿈이라 믿고 싶지만, 안착된 현실이다. 노파는 아직도 꿈결을 헤매는지 호흡조차 들리지 않는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두 눈이 크게 뜨인다. 출근시간인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방문을 연다. 그제야 반지하 창문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보인다. 어둠에 잠긴 노파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노파의 낮은 숨결이 목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다. 시간에 겨우 맞춰 가게로 들어간다. 흘겨보는 주인의 눈초리가 느껴진다. 주방에 있던 수혁이 꾸벅 인사한다. 주인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자 수혁이 포장된 치킨봉지를 내 앞으로 내민다. 잔소리를 피하게 해주는 수혁만의 방법이다. 헬멧을 쓰고 밖으로 나간다. 뙤약볕이 따갑게 쏟아져내린다. 오토바이를 탄 뒤 도로에 오른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 속 메시지를 본 후 가슴 한켠이 뜀박질하기 시작한다. 기다리던 메시지가 왔다. 다음날 저녁에 보자는 딸애의 연락이다. 가속페달을 조금 더 세게 밟는다. 배달에서 돌아온 후 사장에게 사정을 말하니 월급에서 제외하겠다는 말로 답한다. 수혁은 내가 해야 하는 배달만큼 더 달려야 한다. 수혁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네자 웃는 얼굴로 사양한다. 아무리 배달을 돌고 돌아도, 뛰고 또 뛰어도, 발걸음이 가볍다. 황혼을 알리는 노을이 질 무렵, 오늘 하루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노파가 떠오른다. 원체 입이 짧은 사람이지만, 무엇 하나 들어가지 않았으니 곯은 배만 웅크리고 있을지 모른다. 한기가 뺨을 때린다. 방문을 연다.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노파가 보인다. 노파의 입으로 바투 귀를 갖다 댄다. 아침보다 낮아진 숨소리가 미미하게 들린다. 볼을 건드리자 낮게 눈을 뜬 노파가 나를 본다. 이내 눈이 감긴다. 부엌으로 가 주전자에 물을 데운다. 물 끓는 소리가 집 안 가득 퍼진다. 컵에 뜨거운 물을 담아 방으로 향한다. 한 숟가락씩 천천히 목구멍 너머로 넘겨준다. 노파의 눈꺼풀이 사르르 풀린다. 주방 바닥에 놓여 있던 믹서에 미음과 시금치를 넣고 돌린다. 물을 넣어 저어준다. 노파를 모로 눕힌 뒤 또다시 수저질을 반복한다. 정신을 차린 노파가 나를 바라본다. 소눈망울 같은 시선을 피하고 기저귀를 벗긴다. 먹은 게 없어서인지 나온 것 또한 없다. 아기오줌 같은 검붉은 설사만 남아 있다. 몸을 닦고 새 기저귀로 갈아입힌다. 노파를 바로 눕힌 뒤 매트리스에 눕는다. 내일의 바람결은 조금 더 포근했으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어 노파가 쓰러졌다. 매서운 동풍이 부는 날이었다. 서릿발 맞은 보리를 고르기 위해 산에 올라가던 길, 한파를 맞고 고스란히 엎어졌다. 맨손으로 육남매를 키운 여인의 결말이라 부르기엔 가혹한 처사였다. 형제들은 가슴 아파했지만, 먼저 나서는 이는 없었다. 병실 침대 위로 누운 노파를 두고 침묵이 감돌았다. 그나마 먹고살 만한 게 성근이잖아. 부탁 좀 할게. 큰누나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아내가 손등을 꼬집었다. 몸의 반쪽이 굳은 노파가 나를 건네 봤다. 다른 아이들보다 늦둥이인 나를 더 챙겼던 노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겠어요. 아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노파의 주름진 손만 눈에 들어왔다. 노파는 한 그릇도 채 비우지 않고 입가를 다문다. 입꼬리의 반쪽은 탈을 쓴 것처럼 말려 올라가 있다. 늦게 들어오니까 마저 드세요. 앙다문 노파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깊은 잠에 빠지듯 눈을 감는 노파. 개수대에 그릇을 놓고 밖으로 나선다. 약속시간까지 두 시간 남짓 남았지만 미리 가 있기로 한다. 벽공을 지나온 바람이 머리칼을 스친다. 카페 안 대학생들을 보니 아이들이 떠오른다. 올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도 저만큼 자랐을까. 간간이 아내에게 안부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주홍빛 노을이 창을 뚫고 떨어진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누군가 콕콕 심장을 찌르는 것 같다. 차임벨이 들릴 때마다 입구를 바라본다. 그때 한 쌍의 남녀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이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시선이 마주친다. 표정 없는 아이들이 내 곁으로 다가온다.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발이던 딸애는 허리까지 머리를 길렀고, 아들은 그새 안경을 쓰고 있다. 어느새 아이들은 내 키를 넘고도 한 뼘 더 자랐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아이들이 자리에 앉는다. 엉거주춤 따라 앉는다. 아들이 음료를 주문하러 간 사이, 엄마는? 띄엄띄엄 묻자, 딸애는 답이 없다. 정적만이 맴돈다. 아들이 돌아오고, 굳게 닫혀 있던 딸애의 입이 열린다. 엄만 아직 준비가 안 됐나 봐요. 노파가 누워 있는 방문을 보고 한숨만 내쉬던 아내의 모습이 파문처럼 일렁이다 사라진다. 안경을 추켜올린 아들이 연이어 말한다. 그래도 유학 마무리까지 보태주셔서 감사해요. 다른 회사 취직하신 거예요? 아들의 시선이 내가 입은 양복으로 향해 있다. 잠잠히 고개만 끄덕인다. 옆에 있던 딸애의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그러면 아빠 문제없어요. 할머니만 어떻게 맡겨보세요. 고개를 드니 빤히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있다. 현기증이 인다. 송장처럼 누워 있을 노파의 모습이 보인다. 침묵을 지키자 아이들의 입이 연이어 열린다. 엄마 고생한 거 알잖아요. 큰아빠들 힘들다고 해도 딱 잘라 말하세요. 찻잔의 손잡이만 매만진다. 아이들은 입을 다문다. 딸애의 말이 귓전을 울린다. 아무튼 할머니랑 살 순 없어요. 정리하시고 연락 주세요.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파도처럼 빠져나간다. 빈자리 위로 주홍빛 노을이 내려앉는다.
암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개미집으로 들어선다. 전봇대의 불빛은 꺼져 있다. 딸애의 입에서 나온 정리한다는 말의 의미를 되짚는다. 아이들의 시간 속 내가 없었던 자리를 더듬어보지만, 무엇을 놓고 온 건지 알 수 없다. 층계를 내려가 문을 연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날이 지날수록 고약해지는 것 같다. 가슴이 사레에 들린 것처럼 답답하다. 주먹을 쥐어 쳐보지만, 응어리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누워 있던 노파가 눈언저리를 치켜떠 나를 본다. 멍하니 바라보니 노파가 먼저 시선을 피한다. 노파의 한쪽 손이 꿈틀거린다. 자리에 앉아 노파의 눈을 마주 본다. 이번에도 노파는 눈초리에서 벗어난다. 두 손을 들어 노파의 얼굴을 바로잡는다. 부러 눈길을 따라잡는다.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큼지막한 눈자위로 물기가 맺힌다. 우우. 짐승의 소리가 비뚤어진 입을 헤집고 나온다. 노파의 이마 위로 얼굴을 맞댄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집에 노파를 데려온 후부터 아내의 몸은 삭정이처럼 말라갔다.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그 사람도 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을 건너온 거겠지. 자신의 어미도 아닌 이의 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닦고, 또 닦았을 것이다.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면 웅크리고 자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요양원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때마다 젊었을 적 노파의 모습이 떠올랐다. 봄이면 내 손을 잡고 산에 오르고, 여름이면 나를 업고 냇가로 갔던 노파. 노파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내 곁으로 걸어와 개나리 꽃봉오리를 건네주곤 조용히 미소지었다. 노파의 미소가 내게 쥐어준 개나리처럼 환히 빛났다. 도랑에서 가재를 잡아 노파에게 넘겨주면, 새끼가재는 다시 강물로 되돌려보냈다. 소리치며 가르치는 대신 오감으로 알려주었다. 잔가지처럼 뻗쳐나오는 노파의 지혜에 놀랄 때마다,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없이 웃었다.
가을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신호는 좀체 바뀌지 않는다. 20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청신호로 바뀌고 모퉁이를 돌아 단지 안으로 들어간다. 치킨을 꺼내들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간신히 시간을 맞출 것 같다. 배달을 시킨 호수로 뛰어가니 눈에 익은 현관문이 보인다. 바가지머리 남학생의 집이다.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배달 왔습니다. 텅 빈 복도 가득 목소리가 울린다. 잠시 뒤 스르르 문이 열린다. 여학생의 얼굴이 문틈으로 빼꼼히 나온다. 씻고 있는데 소리치면 어떡해요. 말을 끝마친 여학생이 앞으로 무언가 내민다. 21분을 지나고 있는 스톱워치다. 고개를 들어 가만히 얼굴을 본다. 눈치를 살피던 여학생이 눈길을 피한다. 뭐해 시발. 문 뒤편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 저번에 보았던 남학생이 나온다. 아저씨 시간 지났잖아요. 온몸을 훑어내리는 남학생의 눈을 빤히 쳐다보자, 기다란 손이 뻗쳐온다. 봉지를 잡은 손을 떨쳐낸다. 아나 존나 짜증 나네. 남학생의 목소리가 한층 더 올라간다. 그냥 다른 거 먹자. 여학생의 주춤거리는 말이 귓바퀴에 파고든다. 순식간에 문이 닫힌다. 핸드폰이 울린다. 처음 보는 번호가 액정 위로 떠오른다. 귓가에 핸드폰을 갖다 대자 낮은 어조의 음성이 들린다. 성근이 핸드폰 맞습니까. 대답을 하지 않자 뒷말이 재빨리 이어진다. 허성근 나다 나 동명고 이호철. 땅딸막한 몸집에 새우눈을 지닌 까만 얼굴의 소년이 머릿속에 스친다. 호철은 잘 지내냐는 말을 시작으로 오늘 동창회에 꼭 나오라는 말을 덧붙인다.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자, 호철의 말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네 소식 다 들었다. 해줄 얘기 있으니까 꼭 나와라 성근아.
애새끼들이 건방지게 공으로 처먹으려고 해. 사장의 성난 목청이 가게를 울린다. 담배를 태우고 있는 수혁의 곁으로 다가가 주머니에 지폐를 넣어준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수혁을 향해 말한다. 한 번만 더 빠질게 미안해. 수혁이 웃는 얼굴로 다시 지폐를 넘기지만 받지 않는다. 수혁을 따라 주저앉아 담배를 태운다. 연기가 높다란 하늘 위로 피어오른다. 한 번만 더 빠지면 다른 사람 구한다는 사장의 엄포에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선다. 호철의 얼굴만 보고 나오면, 평상시 퇴근시간에 맞춰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동창회 장소인 호프집으로 들어가자 불콰한 술기운이 스친다. 벌써부터 몇몇 이들은 풀린 눈으로 하롱거린다. 호철을 찾는 도중 저만치 가운데에 있던 한 사람이 번쩍 손을 든다. 깔끔한 양복을 빼입은 호철이 보인다. 근처 테이블로 다가가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고갯짓으로 인사한다. 머리가 하얗게 쇠기 시작한 이들의 중심에 호철이 앉아 있다. 종업원에게 술잔을 부탁한 호철이 내게 먼저 악수를 청한다. 맞잡은 호철의 손에서 묵직한 기운이 실려온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단단한 자신감이 호철의 눈빛에 녹아 있다. 술잔이 놓인 뒤 시작된 대화는 호철의 주도하에 진행된다. 아이들의 교육부터 시작해 집사람과의 잠자리까지. 갖가지 이야기들이 테이블 위 안줏거리로 놓인다. 금테안경을 쓴 남자가 아내의 축 처진 젖가슴만 보면 벌떡거리던 것도 금세 가라앉는다 말한다. 무리의 웃음소리가 세차게 터져나온다. 낄낄거리던 호철이 양복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남자에게 건넨다. 야, 우리 가게 놀러 와. 기깔난 년 하나 물어줄게. 다시 한번 웃음이 터지는 가운데 술에 취한 무리 녀석 중 한 명이 입을 연다. 갈보장사 하는 것도 자랑이라고 병신새끼. 호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호철의 눈치를 보며 너도나도 명함을 달라 말한다. 호철이 술잔을 넘긴 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결제를 마친 호철이 내 옆에 다가와 차 앞으로 이끈다. 성근아 타라 집까지 데려다줄게. 한산한 밤의 도로가 드넓은 차창에 펼쳐진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말 많던 호철은 침묵만 지키고 있다. 룸미러를 바라본 순간 호철과 눈이 마주친다. 호철이 굳게 닫힌 입을 연다. 성근아, 우리 학교 끝나고 맨날 당구장 가고 짱깨 먹었던 거 기억나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그때 내가 삑사리 떠도 네가 맨날 쿠션 쳤잖냐. 우리 집 돈 없는 건 어떻게 알고 말없이 밥도 사주고. 난 그때 일 못 잊어. 차 안으로 고요가 감돈다. 호철이 다시 한번 입술을 뗀다. 너희 어머니 아프다는 소식 들었다. 근데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 잠자코 있자 다시 한번 호철의 입이 열린다. 나 우리 어매 죽였다. 고개를 돌려 호철을 바라보니, 한쪽 입꼬리를 올린 호철이 나를 쳐다본다. 기류 속으로 적막이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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