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취재 금지를 뚫고 외신으로서는 유일하게 계엄군사작전 현장에 들어갔다. 당시 정부군의 곡사포 쏘는 장면을 잡은 사진.정문태
한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고 나타나 그 시절 외신에서 뛰던 나도 신날 수밖에 없었다. 뉴스뿐 아니라 기획 취재안도 올리는 족족 취재비용이 떨어져 마음껏 세상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 환율이 두 배로 뛰어 국제 뉴스 취재 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났던 그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에도 <한겨레21>은 오히려 국제면을 더 키웠다. 국제 뉴스에 밥줄을 단 외신기자로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은 돈줄이 마른 한국 언론사들뿐 아니라 1990년대 물 쓰듯 돈을 뿌려댔던 국제 언론들도 비즈니스 뉴스를 제외한 일반 국제 뉴스에서 발을 빼면서 비용을 대폭 줄여나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렇게 해서 <한겨레21>은 캄보디아, 동티모르, 아체, 코소보를 비롯한 국제 뉴스를 숱하게 표지에 걸고 나갔다. 국내 판매용 잡지로서는 예나 이제나 상상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던 셈이다. 예컨대, 2003년 아체 관련 국제회의에서는 한글도 읽을 줄 모르는 참석자들이 아체 분쟁을 표지에 건 <한겨레21>을 들고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 그 시절 <한겨레21>은 아체 희생자를 표지 사진으로 걸고 18쪽이나 되는 현장발 기사를 감아올렸다. <한겨레21>이 인도네시아 정부의 취재 금지를 뚫고 외신으로서 유일하게 계엄군사작전 현장에 들어갔다는 것보다도, 국제 언론이 외면한 아체를 그렇게 크게 다뤘다는 사실을 놓고 외신판은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날고 긴다는 인도네시아 <템포>도 <한겨레21>의 사진과 기사 정보를 받아썼다. 그게 <한겨레21>이었다. 그게 우리의 자존심이었다. 세월이 흐른 모양이다. 말마따나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사실 빼고는 다 변했다.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든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애정선도 바뀌어 국제면이 찬밥으로 시들어갔다. 뭐, 회사 사정이나 정책이나 편집장들 의지가 작용했겠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한겨레21>만 가졌던 그 빛난 특장을 키워내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어쨌든. 되돌아보는 게 역사다. 잘나가는 놈들이 꼭 앞만 판 것 같지도 않고, 늘 새로워야 멋있는 것만도 아닌 듯하다. 남들이 하지 않는 걸, 못하는 걸 해온 이들이 결국 이 세상의 지평을 넓혀놓았듯이 <한겨레21>이 이쯤에서 거창한 설계보다는 수줍게 뒤를 돌아볼 때가 된 듯싶다. 내 기억엔 <한겨레21>이 기획도 기사도 사업도 가장 팔팔했던 시기가 국제면이 넘치던 때였다. 우연일까? 50돌에 빛나는 전통 넘길 수 있으려면 달리 보면 세상도 변했으니 잡지가 변한들 울고불고할 것도 없지만, 이 흉포한 국제 자본과 국제 정치권력이 날뛰는 세상을 갈가리 파헤쳐주는 잡지가 하나쯤은 살아남아 저항했으면 하는 바람마저 버리기는 힘들다. 역사란 건 길고 짧음으로 말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잡지 20년이면 청춘일 수도 있고 노망기에 접어들었을 수도 있다. 그 기준은 원칙을 지키느냐 마느냐다. 그게 국내면이든 국제면이든 다를 바가 없다. <한겨레21> 동지들에게 생일 선물로 타이 속담 하나를 보낸다. “십 빠악 와아 마이타오 따아 헨” (สิบปากว่าไม่เท่าตาเห็น). 입 10개로 말하는 것과 눈 하나가 다르다는 건데, 경험을 중시하는 속뜻을 담은 말이다. 눈이 가려면 발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발이 가야 하는 게 우리 팔자다. 그 발로 우리가 가고 없을 50돌에는 빛나는 전통 하나쯤 넘겨줄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래도 아쉽다. 팔팔한 20대 기자들을 국제 뉴스 현장에 마구 집어넣어 국제 언론들과 승부를 걸어보면 어떨까? 멋있지 않겠는가?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hani.co.kr *정문태 전선기자는 <한겨레21> 속, 잡지 속 잡지 아시아 네트워크의 ‘편집장’(팀장)을 지냈습니다. 아시아 네트워크의 모토는 ‘아시아 뉴스를 아시아의 손으로’였습니다. 기자가 겸손하게 얘기하듯 <한겨레21>의 사상 유례없는 배포 있는 국제 기사는 그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시아에게 1달러는 무엇인가’ 등의 기획도 새로웠지만, 무엇보다 그의 책 제목 <현장은 역사다>처럼 발로 뛰며 만난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에너자이저로 만들었습니다.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야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받아 실었고, 야만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아체에서 받은 가장 참혹한 표지를 내세운 <한겨레21>은 그와 함께했기에 20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