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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모래시계 말처럼 정말 검사가 많은가

20여 년 전 유서 대필 사건이 지금 무죄판결 나도 여전히 ‘견찰’ ‘떡찰’ ‘색찰’ 전통만
변하고 변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의미 없어, 우리가 변하게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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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04 17:53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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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유서 대필 사건’은 검찰이 처음부터 기획·조작한 사건이었다. 1992년 4월20일 강기훈씨가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한겨레 이정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니,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 변했을 시간이다. 대한민국 검찰은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그동안 수도 없이 거듭나겠다느니 뼈를 깎는 반성을 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지만, ‘우리 검찰이 달라졌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겨레21>이 창간되던 20년 전은 그야말로 검찰의 전성시대였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한국 사회가 민주화의 첫발을 내디디면서, 그전까지 군사정권 유지의 양대 축이었던 군과 안기부는 한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빈자리를 잽싸게 메운 것은 검찰이었다. 전두환 시절 육사 출신과 법대 출신이 다 해먹는다고 ‘육법당’이란 말이 나왔는데, 거기서 ‘육’이 빠지니 나라가 그야말로 ‘법당’ 천지가 되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 배명인·서동권 등 검찰 출신들이 안기부장에 임명되었고, 검찰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정해창이 청와대 비서실장 자리를 차지했다. 정권의 황태자는 검찰 출신 박철언이었다. 이 무렵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검찰 공화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전두환 때만 해도 검찰은 안기부는 물론이고 경찰에게까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우스운 일이지만 전두환의 형 전기환이 일선 경찰을 오래 한 탓에 경찰의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당시 법무장관 김기춘, 강력부장 강신욱…

예전처럼 군과 정보기관을 동원해 국민을 겁박할 수 없었던 대통령 노태우를 사람들은 ‘물태우’라 불렀다. 노태우는 자신이 ‘물’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 1990년 10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어 1991년 4월26일 강경대라는 대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슬픔과 분노와 절망 속에서 젊은이들의 분신과 투신이 잇달았다. 학생들의 연이은 분신으로 위기에 몰린 수구세력은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재야의 연합조직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가 김기설의 분신 직후 검찰은 동료 활동가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썼다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이른바 ‘유서 대필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수많은 공안 조작 사건이 있었지만, 유서 대필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모든 공안사건이 다 나름대로 발생의 이유가 있지만, 이 사건만큼 정권의 존립 자체가 걸린 위기 상황에서 사건이 조작된 경우는 없다. 또 다른 특징은 검찰의 역할이다. 대부분의 공안 조작 사건에서 검찰은 안기부나 경찰이나 보안사 같은 1차 수사기관이 조작한 사건의 뒤치다꺼리를 담당했다. 그런데 유서 대필 사건은 처음부터 검찰이 기획하고 조작한 사건이다. 당시는 안기부장도, 청와대 비서실장도, 정권의 황태자도 모두 검찰 출신이었다. 대한민국 역사 이래 검찰이 이렇게 체제 유지의 책임을 온전히 떠맡은 적도 없었고, 또 이렇게 뻔뻔하게 사건을 조작한 적도 없었다. 법무장관 김기춘의 지휘 아래 검찰총장 정구영-서울지검장 전재기-서울지검 강력부장 강신욱-주임검사 신상규-수사팀 검사 안종택·박경순·윤석만·임철·송명석·남기춘·곽상도 등은 밤을 새워서 강기훈이라는 청년을 자기가 쓴 유서를 들이밀며 친구를 죽음으로 내몬 피도 눈물도 없는 파렴치범으로, 분신한 김기설은 제 유서조차 쓰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23년이 흘러 강기훈은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지난 20년, 변한 것은 강기훈이 유죄에서 무죄가 되었다는 것이고, 20대의 아름다운 청년 강기훈이 안색도 검은 간암 환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강기훈의 어머니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때 그 검사 나부랭이들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점이다. 강신욱은 이 공으로 검찰 몫 대법관이 되었고, 곽상도는 박근혜 정권의 민정수석이 되었고, 김기춘은 지금 ‘기춘대원군’ 소리를 들으며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강기훈이 무죄가 되었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그저 짐작만 할 뿐, 어떤 흉악한 놈이 그런 흉측한 음모를 꾸몄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채동욱의 축소 수사도 용납 못한 ‘댓통령’


검찰은 지난 20년간 변하지 않은 것일까? 최근 채동욱 검찰총장이 쫓겨난 것을 보면 검찰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채동욱이 박근혜와 김기춘과 <조선일보>에 의해 쫓겨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채동욱을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에 면죄부를 준 정권의 시녀로 기억했을는지도 모른다. 댓글 달고 트위터 날리는 등 말단에서 국정원 차장에 이르기까지 선거에 개입한 수많은 국정원 직원들에게 모두 면죄부를 주고 꼴랑 국정원장 원세훈 한 명만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한 것은 사실 축소 수사라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런데 ‘댓통령’ 박근혜는 이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잘 몰랐지만, 채동욱은 원세훈 하나라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하기 위해 직을 걸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근혜가 채동욱을 찍어냈지만 검찰에는 윤석열이 있었다. 그를 보며 나는 벌써 20년이 된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장면, 강우석 검사가 안기부에 끌려갔을 때 동료 검사가 안기부 간부와 만나 “그 사건 제가 할 겁니다. 우리 검찰에 검사 많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정말 검찰에 검사가 많은 것일까? 윤석열의 뒤를 잇는 검사보다는 ‘견찰’과 ‘떡찰’과 ‘색찰’의 전통을 잇는 검사가 차고 넘친다.

요즘 영화 <변호인>을 보고 감동하는 사람이 많다. 참 고마운 영화지만, 영화 보고 감동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다. 극장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쐬며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변한 것은 우리의 송변은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그 차동영이 지금도 자신의 행동을 애국이라고 당당하게 떠들고 다니는 것이고, 영화 속의 강 검사 같은 자가 바로 김기춘이라는 점이다. 어디 20년뿐이겠는가? 바퀴벌레는 3억2천만 년 동안 그 모습 그대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러나 바퀴벌레가 기어다닌다고 역사가 진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윤석열의 바로 뒤를 이어 연속 안타가 나오지 않았다고 검찰에 기대할 것 없다고 지레 단정할 이유는 없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검찰에서 채동욱이 나왔고, 윤석열이 나왔고, 그 앞에는 PD들을 기소할 수 없다고 버티다 옷을 벗은 임수빈이 있었고, 나경원 후보의 남편인 판사의 기소 청탁을 폭로한 박은정, 검찰의 독립성 훼손에 검사라는 사실이 부끄럽다며 사표를 던진 백혜련, 과거의 공안 조작 사건의 재심에서 상부의 지시를 거부한 채 문을 걸어잠그고 무죄를 구형한 임은정 등 당찬 검사들이 있었다. 분명히 얼음장 밑으로 봄은 오고 있다.

최근 위조 문서로 망신당한 것 보면…

그 봄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누구인가? <변호인>의 차동영이나 강 검사 같은 공안세력의 나라인가, 아니면 국민이 곧 국가인가? 강기훈을 수사했던 그 어느 검사도 강기훈에게 미안하다고, 그때 잘못 생각했다고 사과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차동영이 있었고, 차동영에게 당한 무수히 많은 진우가 있었다. 그 어느 차동영도 그 어느 진우에게, 그 어느 국밥집 아지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변하지 않는 것들을 우리가 변하게 만들어야 한다. 진우들에게, 진우 엄마들에게 차동영이 머리 숙여 사과라도 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80, 90이 된 국밥집 아지매 돌아가시기 전에 차동영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한 번쯤은 따져 물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P.S. 최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에서 검찰이 국정원이 가져다준 위조 문서를 제출했다가 망신당한 사건을 보면 검찰도 변한 것 같다. 유서 대필 사건 때 검찰은 무시무시한 악마였다면, 이번에는 바보가 되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한홍구 교수는 제342호(2001년 1월10일치)에 시작해 제627호(2006년 10월9일치)까지 ‘역사이야기’를 연재했습니다. 중간에 1년을 쉬었다고 합니다. 연재를 시작하며 “그때그때 벌어지는 일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다루어보라 하지만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정치학자나 시사평론가들처럼 발빠르게 움직이는 재주를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라며 저어하던 한 교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누구보다 순발력 있게 역사와 시사를 엮어나갔습니다. 역사학자가 순발력을 가지면 ‘역사적 일’들을 벌입니다. 구구절절 이력은 생략하고, 최근 소식만 적습니다. 한 교수는 ‘손배·가압류 없는 세상을 위한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를 제안하고 2월26일 출범식을 열었습니다. 가끔 그 유려한 이야기 보따리는 어디서 나오나요? 궁금합니다. 수수께끼입니다. 수염? 배? 새벽 4시까지 모든 이들이 떠나간 편집실에서 “보냈다”는 말을 기다리며 홀로 손톱을 뜯던 담당 기자의 하소연을 들어보면 그건 마감 시간을 지키는 엉덩이에서 온 듯합니다. 그런데 이번 마감은 빨랐습니다. “강산이 변하듯 한홍구도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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