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선은 내가 33년 전에 처음 만난 어릴 때 친구다. 이야기를 나누다 취재수첩을 슬그머니 덮고 긴 시간 아줌마 수다를 떨었다.탁기형
대안학교와 선행학습 안 시키기 모든 현황과 사안을 프레임화하고 시스템 문제로 받아들이며 살아오던 내겐 이런 대답은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준다’는 표현을 쓰는 그녀에게 내가 맞노동이 있으면 맞가사는 당연한 거니 ‘도와준다’라는 표현을 쓰지 말자고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그녀의 반응은 “너 참 재밌다. 그냥 도와줘서 고맙다는 건데 거기에 뭐가 그리 분석이 많니. 난 우리 남편한테 불만 없어. 그냥 고마워하고 우리끼리 잘 지내면 되는 거 아냐?”였다. 현명과 지혜 앞에서 논리와 정의가 망신을 당한 셈이다. 그녀는 그런 식이다. 그녀의 그런 부드럽지만 강한 철학의 바탕엔 깊은 신앙과 멋진 부부관계가 깔려 있다. 신앙의 힘은 이해됐지만 남편은 걱정해주지 않더냐 물었다. 아내의 일엔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는단다. 그래도 어쨌든 말리지 않은 그녀의 남편은 서울대 85학번이다. 운동권이었느냐는 질문에 “몰라”라는 대답이 나온다. 아닌 것도 아니고 모른다니. 보기에 없는 답을 고른 그녀의 얼굴 위로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표정과 함께 예의 “지혜 너 참 재밌는 애야”라는 표정도 지나간다. 소개 반 연애 반으로 결혼한 그녀 부부는 결혼 14년차를 맞는 지금도 친구처럼 대화하고 낄낄대며 지낸다고 한다. 부부 사이가 ‘하하’ 웃는 관계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낄낄’대는 관계가 더 바람직한 관계라고 나는 믿는다. 각자 일하느라 바빠서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같은 거 못 챙기며 살지만 생일이 1월17일인 아내에게 어느 날 낮 1시17분에 네 생일 숫자라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하는 로맨티시스트 남편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유일하게 선행학습을 하지 않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 이 대목에서 아예 대안학교로 아이를 보낸 나보다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 네가 더 대단하다 했고, 그녀 역시 본인도 그리 생각한다 해서 또 깔깔 웃는다. 어느덧 ‘취재수첩’은 슬그머니 덮고 긴 시간을 아줌마 수다만 떨다 왔다. 이 영화에서 “정치는 표면일 뿐 경제가 본질”이라는 말이 나온다. 영화의 주제인 동시에 우리 사는 세상의 본질이다. 자본은 권력을 무서워하는 척하고 권력은 자본을 안 무서워하는 척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얘긴 유선이 앞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그녀는 영화에 출연한 이유를 말하며 ‘그게 내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한 이웃을 봤을 때 우리 같은 ‘딴따라’가 할 수 있는 일. 그건 ‘굿’이 아니었던가. 논리는 표면일 뿐 사랑이 본질 ‘논리는 표면일 뿐 사랑이 본질’이라는 말은 교회 주보에서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적어도 내가 그런 말을 쓰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고 오는 길에 내가 그 말을 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할 수 없다. 사랑, 그걸 한번 믿어보는 거다. 세계관 다른 게 무슨 상관이며 논리가 다 무어냐 말이다. 이런 영화에 출연한 것 자체도 멋진 일인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열심히 홍보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든 생각이다. 오지혜 배우·장소협찬 카페 꼼마 *많은 이들은 배우 오지혜를 소신 있는 배우, <사랑밖엔 난 몰라>를 흐드러지게 부르는 배우로 기억하지만 <한겨레21>은 ‘우리 편’으로 기억합니다. 배우 오지혜씨는 <한겨레21>과 독자로 먼저 만났습니다. 명색이 배우가 생활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영화 주간지 구독을 끊고 <한겨레21>만 구독했습니다. 그 소식이 전해져 ‘이주의 독자’란에 소개됐습니다. 덥석 연재를 맡겼더니 배우가 이래도 되나 싶게 유려한 글을 보내왔습니다. 전무후무,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는 자기 이야기를 찰떡같이 알아듣는 ‘딴따라’에 속을 홀딱 벗어 보여주고, 딴따라는 그 이야기를 콩떡같이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한겨레21>은 언제나 오지혜씨의 ‘팬’입니다. 2003년 제442호(1월16일치)에 연재를 시작해 제504호까지 1년4개월간 격주로 연재했고, 2005년 부정기로 부활해 2006년까지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