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으로 귀환한 당신들, 안녕하신가요. 하늘 모서리 끝에 매달려 위태로웠던 그대들, 두 발 딛고 선 땅은 하늘보다 평평하고 평화로운가요. 굴다리에서, 송전탑에서, 철탑에서, 종탑에서 내려온 지금, 혹시 굴다리에서보다, 송전탑에서보다, 철탑에서보다, 종탑에서보다 더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진 않나요. 안부를 묻습니다. 그대들, 정말, 안녕하신 건가요.
<주간 고공21> 마지막 호는 기행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노동자들의 ‘땅 생활’을 찾아 서울에서부터 남하했습니다. 그들은 착륙했으나, 착륙하지 못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어딘가에서 출렁이며 부유하는 듯했습니다.
재능교육 내려가는 방법 본래 ‘이런 얼굴’이었구나. 두 사람을 ‘땅에서’ 처음 보고 든 생각이었다. 하늘에서 봤던 얼굴과는 달랐다. 착륙 직후 병원에서 만난 얼굴도 아니었다. 빛깔이 달랐고, 표정도 달랐다. 몸의 기운이 달랐고, 말의 결도 달랐다. 햇볕에 그을려 거무튀튀했던 피부도 까칠함이 덜했다.
9월3일 오후 도봉산(서울 도봉구) 아래서 오수영씨의 머리카락은 검었다. 202일(2013년 2월6일~8월26일)의 고공농성 동안 그의 머리카락 절반이 하얗게 변했었다. 그가 자랑하듯 웃었다.
“‘네 머리가 너무 하얘서 못 보겠다’시며 시어머니가 염색해주셨어요.” 여민희씨는 엷은 화장을 했다. 화장 때문인지, 조금은 걷힌 우울 때문인지 얼굴색이 맑았다. 두 사람에게 ‘이런 얼굴’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종탑의 긴장과 거리의 고단함이 그들의 얼굴을 바꿔놨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종탑에서 내려온 지 8일째 되는 날이었다. 동료 조합원 3명(황창훈·강경식·이현숙씨)과 모란공원(경기도 남양주 마석)에서 이소선 어머니 2주기에 참석하고 온 길이었다. 이들은 막걸리 두 병과 사과 세 개를 샀다. 도봉산을 품은 하늘은 파랗고 청명했다. 시원한 바람도 곁들였다. 종탑에서 내려오고서야 허락된 하늘과 바람이었다. 만장봉 중턱 만월암 인근이 목적지였다. 여민희씨가 선두에서 쑥쑥 산을 올랐다. 그는 종탑 농성 전까지 노조 등산모임 회원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산을 탔다고 했다. 앞장선 그를 뒤따르느라 숨이 벅찼다. “사람 없는 티가 났어요.” “땅을 밟으면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이 내 집”이라고 그는 종탑에서 말하곤 했다. 법원·경찰서에서 보낸 출석요구서와 알록달록한 음식점 홍보물들로 장식된 현관문이 ‘주인 없음’을 광고하던 집이었다. 204일 만(이틀간 병원 진료 포함)에 돌아간 집은 ‘정신이 빠져’ 있었다.
멀쩡하던 샤워기가 갈라져 물이 새고 있었고, 삭은 거름망이 커피포트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냉장고 음식은 몽땅 상해 썩고 있었고, 라면까지 유통기한을 넘겨 먹을 수 없었다. 하강 이튿날은 남동생 집에서 잤다. 밤에 비가 왔다. 동생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젠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지인들이 문자를 보냈다. “민희씨가 땅에 있으니까 비가 와도 안심이야.” 그는 비로소 땅 위에 있음을 느꼈다.
“집에서도 악몽을 꿔요. 종탑에서 매일 꿨던 꿈이에요. 높은 데서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는 꿈…. 아직도 무서워서 방문을 열어두고 자요.”
만월암은 멀었다. 오수영씨는 꼴찌였다. 일행 맨 뒤에서 천천히 걸었다. “다리가 퉁퉁 부었다”고 했다. “오래 안 쓰던 다리로 갑자기 많이 걷다보니 힘들다”고도 했다. 산 중턱에서 까마귀가 깍깍 울었다.
“종탑 농성할 때도 까마귀들이 날아와서 쓰레기 모아둔 봉투를 갈가리 찢곤 했어요. 그래도 저 녀석들이 길조라고 믿었어요.”
바위를 배경으로 만월암이 올려다보였다. 등산로를 살짝 벗어난 곳엔 아직 ‘빨강’을 얻지 못한 단풍나무가 무성했다. 그 사이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홀로 우뚝했다. 고 이지현 조합원이 살아 있을 때 아끼던 나무였다. 그를 만나러 오른 산이었다. 복직 투쟁 중이던 지난해 1월 중순 그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혼자 야간 산행을 할 만큼 산을 좋아했고, 특히 도봉산을 사랑했다. 임종 직전 남긴 유서에서 이지현씨는 ‘특별한 나무’의 위치를 가족에게 알렸다. 조합원들은 그를 만나고 싶을 때마다 도봉산에 올라 나무를 찾았다. 재능교육 사 쪽과 교섭을 타결했을 때 여민희씨는 “지현 언니에게 재능 선생님이란 호칭을 되찾아줘 기쁘다”고 했다. 오수영씨는 “해고되기 전에 함께 인도 여행 가자며 같이 계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일행들이 나무 앞에서 막걸리를 따르고 사과와 새우깡을 올렸다. “언니가 좋아했다‘며 여민희씨는 종이컵에 커피를 따랐다. 5명이 눈을 감고 묵념했다.
그들은 다음날 자신이 속한 지역국을 찾아 사 쪽과 계약서를 쓸 계획이었다. ‘서류상의 복직’은 이뤄지는 셈이다. “진짜 복직은 수업 배정이 제대로 이뤄지는가”에 달렸다고 오수영씨는 말했다. 생활이 가능할 만큼 사 쪽이 수업을 할당하지 않으면 복직은 허울뿐일 수도 있다.
현장으로 돌아가는 그들에겐 벅찬 숙제가 많다. 거친 세월을 건너온 소수의 노조가 노조 없이 살아온 다수 비조합원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담아내느냐가 고민거리다. 서울시청 옆 환구단에도 재능교육 노조 조합원들이 있다. 그들은 종탑이 사 쪽과 체결한 노사합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재능 투쟁의 시발점이 된 수수료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유다. 서로 치유해야 할 상처가 많고, 함께 허물어야 할 벽도 높다.
헉헉대며 한 발 앞만 보며 올라간 산이었다. 내려올 땐 몇 걸음 더 앞을 봐야 한다. 산을 내려가는 방법도 쉽지만은 않다.
쌍용자동차 침묵과 냉소의 벼랑 “모기한테 다 뜯겼소.” 9월4일 아침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팔뚝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는 지난밤 대한문(서울 중구)에서 노숙했다. ‘동숙’한 복기성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위원장은 씩 웃었다. 일찌감치 온 문기주 정비지회장은 깁스를 하고 있었다. 171일간(2012년 11월20일~2013년 5월9일)의 경기도 평택 ‘송전탑 고공농성 동지들’이 모였다. 경찰은 이날도 화단을 철통 경호했다. 꽃이 없는 계절의 화초들은 경찰 호위 속에서 초록으로 번창했다. 화단에게 밀려난 쌍용차 간이 분향소에선 시들어버린 하얀 국화꽃이 허리를 꺾고 있었다. 수문장 교대의식 요원들이 구호에 맞춰 예행연습을 했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거나 억울한 백성들이 임금에게 울며 읍소했던 곳이 대한문 아니오.” 한 전 지부장이 탄식했다. “분향소는 쌍용차의 슬픈 영혼들을 모신 곳이지만 우리 억울함을 바로잡아달라고 호소하는 장소기도 해요. 집회 공간 문제로 매일 5cm냐 10cm냐 자로 재가면서 경찰과 실랑이를 합니다.”
송전탑에서 내려온 뒤 그들은 정신없이 바빴다. 복기성 수석은 두 주 입원을 거쳐 두 달을 요양해야 했다. 지금도 이틀에 한 번씩 허리 치료를 받고 있다. 한때 190까지 치솟던 혈압은 약으로 잡고 있다. 그의 건강 악화로 쌍용차 송전탑 농성은 중단됐다. 그는 “땅에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 힘들었다”고 했다. “일부러 무리한다”고도 했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대한문 지키고 연대집회 하러 다녀요.” 한 전 지부장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놈아, 무리 좀 하지 말라니까.” 해고 당시 ‘옥쇄파업’을 이끌었던 한 전 지부장은 3년 만기 출소 100여 일 만에 다시 철탑에 올랐다.
문기주 지회장의 깁스는 ‘그날 일’ 때문이었다. 그는 세 사람 중 가장 건강이 좋지 않다. 고공농성 116일째(3월15일) 극심한 어깨통증(어깨충돌증후군)으로 “두 사람을 사선에 남겨둔 채” 홀로 내려와야 했다. 그날, 6월10일. 분향소 철거를 막던 김정우 지부장이 연행됐다. 3개월째 구속 상태다. 문 지회장도 연행됐다. 40일간 입원 치료 뒤 침을 맞으며 버티던 때였다. 연행 과정에서 경찰에게 두 팔이 ‘닭 날개처럼’ 꺾이며 인대가 파열됐다. 7월 말 부산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아직도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철탑 농성 이후 잃은 몸무게 6kg도 되돌아오지 않고 있다.
고압의 전류는 습한 공기와 만날 때마다 ‘지지직’ 끓었다. 안개나 부슬비가 내릴 때면 파란 전류가 눈앞에서 지글거렸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감전의 공포에 소름이 돋았다. 세 사람은 15만4천V의 고압 전자파가 몸에 어떻게 잠복해 있을지 몰라 무섭다고 했다.
고압 전류보다 두려운 건 절망이었다. 복기성 수석은 잇따른 죽음의 충격으로 철탑에서 많이 울었다. 농성 중 쌍용차뿐 아니라 한진중공업과 기아자동차 등의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했다. 모두 그와 친했던 사람들이다. 그는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힘들었다”고 했다. “세상은 반응하지 않고 고립감은 심했어요. 각자가 무슨 ‘돌발 선택’을 할지 몰라 어느 순간부터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문기주 지회장이 말했다.
착륙 뒤에도 ‘절망의 회로’는 작동했다. 지난해 대선 전후 새누리당 의원들과 박근혜 캠프가 앞다퉈 약속한 국정조사는 기억조차 잊히는 분위기다. 회계 조작을 통한 ‘기획파산’ 사실이 밝혀져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 절망 속에서 지금까지 24명이 죽어갔다. 쌍용차 복직 투쟁도 이미 1500일을 넘어섰다.
“며칠째라며 기념행사를 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져요. 우리의 절규에 세상은 대꾸도 없는데 숫자에라도 의지해 호소해야 하는 현실이 견디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자본은 비정하고, 정치권력은 득실에만 밝으며, 세상은 무감각하다. 단식은 그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하늘에 올라도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무언’과 ‘침묵’과 ‘냉소’는 점점 더 날카로운 벼랑에 설 것을 강요하는 ‘굉음’과 다르지 않다. 문기주 지회장은 반문했다.
“우리에게 더 극단적 선택을 압박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 선택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죽으라는 건가요.”
한상균 전 지부장은 ‘희망의 기류’가 없지 않다고 했다. “이젠 치유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파업 뒤 생긴 기업노조와 해고자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4년 만에 회사로 들어가 공식 방문했습니다. 단일 사업장 문제로 주요 종단 모두가 사태 해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 쪽과 국회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주길 호소합니다.”
유성기업 시동 거는 재징계 절차 따가운 가을 햇살에 벼가 노랗게 변신하고 있었다. 유성기업(충남 아산시 둔포면) 진입로는 전보다 말끔했다. 굴다리 벽에 설치됐던 고공농성장과 주변도 대부분 정리돼 있었다. 9월4일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지회 사무실 앞에선 용역 경비가 무전기를 들고 출입자를 체크하고 있었다. 최근 2개월 사이에 등장한 새 풍경이라고 했다. 홍종인 지회장은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의 1인용 낚시텐트는 고공농성장 중 가장 좁고 낮았다. 150cm의 텐트 높이는 185cm 키의 그가 무릎관절을 세울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151일(2012년 10월21일~2013년 3월20일) 동안 앉아 지낸 그는 혈전증과 근육소진으로 농성을 마쳐야 했다. 관절을 잡아줄 근육이 없어 땅에서 첫발을 떼는 순간 무릎 위아래가 따로 놀며 주저앉았다. 직립보행을 하기까지 그는 휠체어→목발→지팡이를 차례로 의지했다. 그는 농성 전 기간 동안 목에 밧줄을 메고 살았다. “진압이 들어올 경우 목을 걸고 죽겠다는 뜻이었다”고 했다.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노조의 싸움은 ‘좀 자면서 일하자’는 희망으로 시작됐다. 노조는 ‘주야 2교대→주간연속 2교대’ 전환을 요구하며 2011년 5월 부분파업을 벌였다. 회사는 직장폐쇄로 대응했고, 경찰은 강제진압으로 화답했다. 사 쪽은 제2노조를 만들어 대표 교섭권도 넘겼다. 뒤엔 노조파괴로 악명 높은 창조컨설팅의 자문이 있었다. 파업 종료 뒤 회사는 두 차례에 걸쳐 27명을 해고했다. 홍 지회장은 노조 파괴 책임자 처벌과 해고자 복직, 어용노조 해산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기간 중 구사대 활동에 괴로워했던 것으로 알려진 노동자가 자살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굴다리에서 내려왔으나 요구 조건이 이행된 것은 거의 없다. 사 쪽은 지난 5월28일 해고자 전원 복직 방침을 발표했다. 검찰의 부당노동행위 수사와 창조컨설팅과의 유착 혐의 무마를 위한 복직 발표라고 노조는 봤다. 당시 해고자들에게 보낸 공문에서 사 쪽은 ‘복직 후 재징계’를 예고해 논란을 낳았다.
3개월이 지났다. 사 쪽은 9월4일 해고자들에게 ‘징계위원회 출석 통지서’를 보냈다. 2011년 5월부터 7월까지 직장폐쇄 기간 중 불법행위에 대해 징계위원회를 열겠다는 내용이다. 사 쪽이 복직 발표 당시 예고했던 재징계 절차가 시동을 건 것이다. 노조는 ‘위기탈출용’으로 복직시켰던 해고자들을 재해고하기 위한 수순이라고 보고 있다.
사 쪽은 징계를 현실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이미 갖춰놓고 있다. 회사는 지회와 단협을 해지하고 제2노조에 대표 교섭권을 준 뒤 징계위원회 구성을 바꿨다. ‘노사 각 5인의 징계위원으로 구성하고 해고는 3분의 2 이상으로 결정한다’는 기존 조항을 ‘노사 각 5인의 징계위원으로 구성하고 해고는 가부 동수일 경우 사 쪽 의장이 결정한다’로 바꿨다. 홍 지회장은 “노조 핵심 활동가들을 재징계해 해고하겠다는 의도”라고 했다.
151일을 견뎠던 굴다리 위에 그가 다시 섰다. 굴다리는 직장폐쇄 때 진압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던 곳이다. 유성기업에서 고공의 고통스런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고공농성 요구가 받아들여진 건 없지만 현장 조직력은 복원됐습니다. 지난 3월 이후 매일 전면파업과 부분파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그만큼 노동자들이 현실의 부당함을 깨닫고 있다는 뜻입니다.”
홍 지회장이 등진 굴다리 도로 위로 크고 작은 차들이 고속으로 질주했다. 노조는 이달 말 새 집행부를 뽑는다.
현대자동차 새로운 싸움 296일(2012년 10월17일~2013년 8월8일)의 하늘 생활을 견딘 최병승·천의봉씨는 땅에서 고민이 많은 듯했다. 두 사람은 말을 많이 아꼈다. 지난 8월31일 2차 울산 현대자동차 희망버스 때 최병승씨는 단상에 올라 ‘땅의 노동자’로 돌아온 뒤 겪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야기했다. 아직 병원에 입원 중인 천의봉씨는 영상으로 인사를 전했다. 착륙 직후 만났던 최병승씨는 “지금은 무슨 말을 하기가 두렵다”고 했다. “10년 동안 4차례 수배되고 2차례 구속된 내 인생이 가끔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하늘에 있을 때 목숨을 끊은 박정식 아산지회 사무장의 빈소를 찾아 그의 어머니 앞에서 목 놓아 울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희망을 놓지 마세요.” 그의 장례식이 9월5일 세상을 떠난 지 52일 만에 전국노동자장으로 치러졌다. 최병승씨는 새로운 싸움에 나섰다. 8월 말부터 현대차와 정규직 복직을 놓고 협상을 벌이던 그는 지난 4일부터 출근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복직이 사내하청 노동자 정규직 전환의 물꼬를 트는 선례가 되길 바라고 있다. 지난해 2월 대법원은 현대차의 불법 파견 사실과 그의 정규직 신분을 확인했다. 그는 지난 1월9일자로 출근하라는 사 쪽의 인사 발령을 거부하고 고공농성을 계속했다. 현대차가 불법 파견을 인정하고 사내하청 전체를 정규직화하라는 요구였다. 그가 철탑에서 내려온 뒤 8월12일 사 쪽은 그의 출근을 독촉했고 28일 배치 전 교육을 명령했다. 출근과 교육 참가 미이행 땐 사규에 따라 처벌하겠다는 방침이다. 최병승씨의 인사 명령 불이행을 이유로 사 쪽이 징계를 시도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는 9월3일 사내에 붙인 입장문에서 이렇게 요구했다. “(사 쪽은) 철탑 고공농성이 시작되자 투쟁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인사 명령을 통보했다. 중앙노동위원회 재심 판정 결과에 따라 단체협약을 적용하고 판결 불이행과 일방적 인사 조처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라.” 고공의 여정은 하늘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땅에서 살기 위해 오른 하늘이었으나, 땅으로 돌아온 뒤에도 고공의 가파른 삶은 계속되고 있다. 하늘을 오르는 두려움보다 내려오는 막막함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오늘이다. 당신과 우리의 시대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재능교육 내려가는 방법 본래 ‘이런 얼굴’이었구나. 두 사람을 ‘땅에서’ 처음 보고 든 생각이었다. 하늘에서 봤던 얼굴과는 달랐다. 착륙 직후 병원에서 만난 얼굴도 아니었다. 빛깔이 달랐고, 표정도 달랐다. 몸의 기운이 달랐고, 말의 결도 달랐다. 햇볕에 그을려 거무튀튀했던 피부도 까칠함이 덜했다.
재능교육 노조 조합원들이 9월3일 도봉산(서울 도봉구)에 올라 고 이지현씨가 아꼈던 소나무 앞에서 약식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왼쪽부터 황창훈·오수영·강경식·여민희·이현숙씨.이문영
“‘네 머리가 너무 하얘서 못 보겠다’시며 시어머니가 염색해주셨어요.” 여민희씨는 엷은 화장을 했다. 화장 때문인지, 조금은 걷힌 우울 때문인지 얼굴색이 맑았다. 두 사람에게 ‘이런 얼굴’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종탑의 긴장과 거리의 고단함이 그들의 얼굴을 바꿔놨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종탑에서 내려온 지 8일째 되는 날이었다. 동료 조합원 3명(황창훈·강경식·이현숙씨)과 모란공원(경기도 남양주 마석)에서 이소선 어머니 2주기에 참석하고 온 길이었다. 이들은 막걸리 두 병과 사과 세 개를 샀다. 도봉산을 품은 하늘은 파랗고 청명했다. 시원한 바람도 곁들였다. 종탑에서 내려오고서야 허락된 하늘과 바람이었다. 만장봉 중턱 만월암 인근이 목적지였다. 여민희씨가 선두에서 쑥쑥 산을 올랐다. 그는 종탑 농성 전까지 노조 등산모임 회원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산을 탔다고 했다. 앞장선 그를 뒤따르느라 숨이 벅찼다. “사람 없는 티가 났어요.” “땅을 밟으면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이 내 집”이라고 그는 종탑에서 말하곤 했다. 법원·경찰서에서 보낸 출석요구서와 알록달록한 음식점 홍보물들로 장식된 현관문이 ‘주인 없음’을 광고하던 집이었다. 204일 만(이틀간 병원 진료 포함)에 돌아간 집은 ‘정신이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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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쌍용자동차 앞 송전탑에서 고공농성을 했던 복기성, 한상균, 문기주씨가 4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대한문 쌍용자동차 희생자 시민분향소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쌍용자동차 침묵과 냉소의 벼랑 “모기한테 다 뜯겼소.” 9월4일 아침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팔뚝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는 지난밤 대한문(서울 중구)에서 노숙했다. ‘동숙’한 복기성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위원장은 씩 웃었다. 일찌감치 온 문기주 정비지회장은 깁스를 하고 있었다. 171일간(2012년 11월20일~2013년 5월9일)의 경기도 평택 ‘송전탑 고공농성 동지들’이 모였다. 경찰은 이날도 화단을 철통 경호했다. 꽃이 없는 계절의 화초들은 경찰 호위 속에서 초록으로 번창했다. 화단에게 밀려난 쌍용차 간이 분향소에선 시들어버린 하얀 국화꽃이 허리를 꺾고 있었다. 수문장 교대의식 요원들이 구호에 맞춰 예행연습을 했다.
홍종인 금속노조 유성기업 지회장이 9월4일 오후 고공농성을 벌였던 굴다리 위에 다시 섰다. 홍 지회장이 지난해 12월 회사 앞 굴다리에 매단 농성천막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오른쪽 사진 속 사진).김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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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기업 시동 거는 재징계 절차 따가운 가을 햇살에 벼가 노랗게 변신하고 있었다. 유성기업(충남 아산시 둔포면) 진입로는 전보다 말끔했다. 굴다리 벽에 설치됐던 고공농성장과 주변도 대부분 정리돼 있었다. 9월4일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지회 사무실 앞에선 용역 경비가 무전기를 들고 출입자를 체크하고 있었다. 최근 2개월 사이에 등장한 새 풍경이라고 했다. 홍종인 지회장은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의 1인용 낚시텐트는 고공농성장 중 가장 좁고 낮았다. 150cm의 텐트 높이는 185cm 키의 그가 무릎관절을 세울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151일(2012년 10월21일~2013년 3월20일) 동안 앉아 지낸 그는 혈전증과 근육소진으로 농성을 마쳐야 했다. 관절을 잡아줄 근육이 없어 땅에서 첫발을 떼는 순간 무릎 위아래가 따로 놀며 주저앉았다. 직립보행을 하기까지 그는 휠체어→목발→지팡이를 차례로 의지했다. 그는 농성 전 기간 동안 목에 밧줄을 메고 살았다. “진압이 들어올 경우 목을 걸고 죽겠다는 뜻이었다”고 했다.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지난 8월8일 296일간의 철탑농성을 마치고 내려온 최병승(오른쪽 두 번째)씨와 천의봉(세 번째)씨.한겨레 신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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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새로운 싸움 296일(2012년 10월17일~2013년 8월8일)의 하늘 생활을 견딘 최병승·천의봉씨는 땅에서 고민이 많은 듯했다. 두 사람은 말을 많이 아꼈다. 지난 8월31일 2차 울산 현대자동차 희망버스 때 최병승씨는 단상에 올라 ‘땅의 노동자’로 돌아온 뒤 겪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야기했다. 아직 병원에 입원 중인 천의봉씨는 영상으로 인사를 전했다. 착륙 직후 만났던 최병승씨는 “지금은 무슨 말을 하기가 두렵다”고 했다. “10년 동안 4차례 수배되고 2차례 구속된 내 인생이 가끔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하늘에 있을 때 목숨을 끊은 박정식 아산지회 사무장의 빈소를 찾아 그의 어머니 앞에서 목 놓아 울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희망을 놓지 마세요.” 그의 장례식이 9월5일 세상을 떠난 지 52일 만에 전국노동자장으로 치러졌다. 최병승씨는 새로운 싸움에 나섰다. 8월 말부터 현대차와 정규직 복직을 놓고 협상을 벌이던 그는 지난 4일부터 출근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복직이 사내하청 노동자 정규직 전환의 물꼬를 트는 선례가 되길 바라고 있다. 지난해 2월 대법원은 현대차의 불법 파견 사실과 그의 정규직 신분을 확인했다. 그는 지난 1월9일자로 출근하라는 사 쪽의 인사 발령을 거부하고 고공농성을 계속했다. 현대차가 불법 파견을 인정하고 사내하청 전체를 정규직화하라는 요구였다. 그가 철탑에서 내려온 뒤 8월12일 사 쪽은 그의 출근을 독촉했고 28일 배치 전 교육을 명령했다. 출근과 교육 참가 미이행 땐 사규에 따라 처벌하겠다는 방침이다. 최병승씨의 인사 명령 불이행을 이유로 사 쪽이 징계를 시도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는 9월3일 사내에 붙인 입장문에서 이렇게 요구했다. “(사 쪽은) 철탑 고공농성이 시작되자 투쟁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인사 명령을 통보했다. 중앙노동위원회 재심 판정 결과에 따라 단체협약을 적용하고 판결 불이행과 일방적 인사 조처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라.” 고공의 여정은 하늘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땅에서 살기 위해 오른 하늘이었으나, 땅으로 돌아온 뒤에도 고공의 가파른 삶은 계속되고 있다. 하늘을 오르는 두려움보다 내려오는 막막함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오늘이다. 당신과 우리의 시대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