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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도둑에게 ‘빈집’ 광고했나요

혜화동 성당 종탑에서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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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8 18:47 수정 : 2013-08-0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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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수원시 한 아파트의 여민희 편집위원 집. ‘181일째 주인 없는’ 빈집 현관 위로 법원과 경찰서에서 보낸 출석요구서와 음식점 홍보물 등이 가득 붙어 있다.여민희 제공
“누나, 법원에서 무슨 등기가 이렇게 많이 왔대?”

전화기 너머 남동생의 목소리가 ‘반은 짜증 반은 걱정’이었다.

“경찰서에서도 몇 통씩 왔는데? 이거 괜찮아? 우편물도 잔뜩이고, 광고지도 한가득 붙어있고, 도시가스 검침도 받아야 한다는데….”

동생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기 빈집입니다’ 광고를 하고 있네.”

그렇다. 빈집이다. 181일(8월5일 기준)째 비어버린 집. 추운 겨울이었다. 종탑에 오르기 하루 전날 새벽 4시께 집을 나섰다.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할 준비를 해야 했기에 필요한 옷가지와 물건들을 4개의 가방에 담아 두번에 걸쳐 짐을 차에 실었다. 문 단속을 하고, 가스밸브를 잠그고, 전원을 차단하고, 마지막으로 외출로 맞춰놓았던 보일러 버튼의 전원을 끄고 나왔다. ‘그래, 어차피 봄이나 지나야 오게 될텐데, 그동안 얼어 터지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허한 마음을 달래며 서울로 달렸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한창이다. 빈집 현관문엔 서울중앙지방법원과 대법원에서 온 등기 수령 안내서가 덕지덕지 붙고 있다. 수취인 없는 우편물이 산처럼 쌓이고 있다. 농성이 예상 이상으로 길어지자 동생도 마음이 쓰이는지 누나 집에 가서 좀 살펴봐야겠다고 했다.

“다른 이상은 없고 화초는 다 죽었어.”

수년간 애지중지 키웠던 화초가 한꺼번에 다 죽어버렸다. 잊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날 화분에 물을 주며 “잘 견뎌달라”고 말한 뒤 그들을 그냥 잊고 있었다. 미안했다. 일상과 떨어진 종탑 생활 속에서 내 집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이 찍어 보낸 현관문 사진은 빈집을 찾아헤매는 ‘도둑님’의 눈에 번쩍 뜨일 만한 풍경이었다. 재능교육 회사에서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고소·고발한 사건 재판에 출석하라는 법원 등기 우편물 안내서만 10여장이 붙어 있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 범국민대회 건 참가와 관련한 경찰조사 출석 요구서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신장개업한 중국집 홍보 전단지들은 칙칙한 현관문을 알록달록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재능교육은 변함없이 해고자 신분인 조합원들과는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한다. 학습지 교사로 열심히 일하던 조합원들을 해고한 것도 재능교육이고, 네 차례나 갱신 체결해오던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도 재능교육이다. 원래 있던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 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재능교육 사옥을 마주 보는 성당 종탑에 올라 플래카드를 걸고 외치고있는 이유다. “단체협약 원상회복!” “해고자 전원 원직 복직!” 종탑에서 내려오면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사실 종탑에 오르기 전부터 ‘재능투쟁이 승리하고 종탑에서 내려가게 되면 꼭 가야할 곳’을 생각해뒀다. 두 곳이다.

한 곳은 이번 투쟁 중 세상을 떠난 이지현 조합원이 있는 곳. 또한 곳은 종탑에 올라오느라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윤주형(지난 1월28일 목숨을 끊은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동지의 안식처다.

그리고 두 곳보다 먼저 가고싶은,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나의 집이다. 집에 가고 싶다. 기다리는 사람 없는 집이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내 방내 침대에 가만히 눕고 싶다.

여민희 편집위원·재능교육 해고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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