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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특강-거짓말] ‘통일’보다는 ‘통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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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04 00:00 수정 : 2009-03-2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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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민 김형덕과 함께한 ‘북한에 대한 거짓말’…북에 대한 환상 위험하지만 나쁜 이미지 확대할 필요도 없어

▣ 김종옥 7·8기 독자편집위원

김형덕은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속해 있다고 해서 참아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다. 그래서 좀 있다고 떠세를 부리거나 제 이익에 눈이 어두운 부라퀴들 틈에서는 도저히 견뎌낼 재간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새터민이면서도 어느 쪽을 이유 없이 두남두길 깨끗이 거부하고 기꺼이 그 경계선상에 머무는 이다.

거듭된 밀입국, 두번의 투옥과 탈옥


3월27일 서울 연세대학교 위당관에 앉아 강연을 기다릴 땐 사실 그가 하고 싶은 말보다는 그가 살아낸 인생길이라는 엄청난 분량의 드라마가 궁금했다. 북한 내에서 두 번의 탈옥을 감행했고, 중국·베트남·홍콩으로 밀입국을 거듭해 한국에 오기까지 다시 두 번의 투옥과 탈옥을 겪었다. 한국에 와 대학에 진학해 경영학을 공부하며 가정을 꾸렸고, 이후 국회의원 비서관, 모 기업체 직원으로 일했다. 사회자 오지혜씨의 말대로, 한 줄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살아온 인생과 일상이 더 많은 걸 얘기한다.

새터민 김형덕씨는 ‘통일’이란 단어에 도사린 강국의 신화와 일방주의를 경계한다. 좀더 유연하게 교류를 하면서 한반도의 ‘통합’을 모색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강연 내내 자신의 신념을 설명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걸 더 아까워했다. 그는 “끝끝내 살아남아서 남과 북을 다 같이 보고 공존할 길을 모색하는 중간자 역할을 하기로 결심했으며, 그것이 탈북한 것에 대한 자기 이유가 될 것”이라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요약했다.

(그는 ‘북한’이나 ‘통일’이란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북한’이라는 용어는 남한에서 북측에 일방적으로 붙인 용어이므로 오히려 국제 사회와 북측이 사용하는 ‘조선’이란 용어를 인정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통일’이라는 말도 흡수통일의 느낌이 강하고 합치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불러일으키므로 대신 ‘통합’이나 ‘공존’이라는 말을 쓰는 게 더 좋다고 말한다."

거짓말에 대한 담론이 이번 특강의 주제이니만큼 북측에 대한 남한 사회의 의도적인 거짓말(환상이든 배척이든)을 지적하면서 강연이 시작됐다. 강연의 몇 대목을 소개한다.

*‘남한 사회가 자꾸 북을 이용해먹는’ 느낌이 들어 남한 정치권의 행태에 안타깝다. 선거기간만 되면 북풍이 불더라.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문제를 놓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여당이나 악용하려던 야당이나 모두 그 얄팍한 속내가 드러난다. 강정구 교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보단 교류를 활성화해 남북이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연동 관계를 가지며 통합을 모색하는 게 옳다. 그것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이질감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 우리가 주도해서 북을 우리 쪽으로 편입시키려는, 우리와 똑같이 만드려는 고집은 버려야 한다. 우리와 다른 사회로 가더라도 그걸 인정하고 도와야 한다. 끝까지 설득해 국제 사회에서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적대적으로 대하면 당연히 그 쪽도 적대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어려울 때 충분히 도와주면 북도 당연히 보답한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교류가 통합의 지름길임이 분명한데, 이 과정에서 북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장점도 단점도 잘 알아야 한다. 사실, 북은 나를 수십 년 동안 속여 왔다. 북의 형편이 어려워진 게 남한과 미국 탓이라고 했지만 그런가. 하지만 난 이를 자꾸 들먹이려 하지 않는다. 북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확대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말썽이 난 납북자 문제도 그렇다. 북은 일본과 수교해서 국제 사회로 나오고 싶어하는데, 남한에서 납북자를 자꾸 거론해서 관계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야할까? 우리 국력이 50배나 강하다면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북도 변화로 응대한다. 아마 북이 부를 축적하면 당연히 내부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때까지 도와주고 기다리고, 과거의 일정 부분은 덮어주는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줄 거면 확실하게 주어야 한다

*북에 대해 환상을 가진 사람들은 북이 민족적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작은 그랬다고 봐야 하지만, 해방 뒤 남한 사회가 거듭되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거쳐 민주주의라는 정통성을 확보하는 동안 북한은 오히려 정통성을 상실했다. 개인숭배나 특정 세력이 지배적 위치를 갖는 게 가장 잘못인데 그 원인은 주체사상에 있다. 북은 ‘우리민족제일주의정신’의 핵은 민족자주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의 민족자주정신에는 휴머니즘과 자유주의가 배제돼 있다.

*그럼에도 상대의 단점을 들춰내 공격하는 것은 서로에게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북에선 보편적 가치가 상당 부분 결여돼 있다는 걸 전제하면서 대화를 계속 해야한다. 상대의 장점을 인정하고(강한 민족적 자긍심이랄지, 주체적으로 세상을 보는 당당함 같은 건 북의 장점이 아닌가)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

김형덕씨의 진지한 고민은 청중들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삶에서 우러나온 평화에 대한 신념은 한 줄의 이데올로기 이상의 것이었다.

김형덕씨는 “양쪽이 자기의 틀, 방식, 형태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서로 ‘지금과 다른 형태’의 발전된 사회로 변화해서,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통합해 영세중립국으로 가는 게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길이라는 개인적 소신이 있다. 어려운 게 아니다. 다만 용기를 내면 된다”라는 말로 강연을 마쳤다. ‘다만 용기를 내면 된다’는 그의 말이 깊은 울림을 갖는 건 그가 말하는 ‘용기’가 목숨을 건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다양하고 진지하고 심도 있는 대화가 진행돼 이번 특강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느낀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는데, 지면이 적어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북에 대한 지원을 놓고 우리 내부는 물론 미국, 일본 등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반대로 중국의 북한 지원은 요란하다.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우려가 있다고 보는데?

*김형덕: 중국인은 워낙 10년을 내다보고 장사하는 사람들이다. 북이 가장 어려울 때 유리공장을 지어줬는데 그냥 이겠나. 지원해주고 얻어낸 게 더 크다. 남한은 지원에 소극적이다. 줄 거면 확실하게 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얻는 게 분명 있다.

(여고생): 통일을 왜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친구들이 많은데?

*김형덕: 한마디로 영구적 평화를 얻기 위해서다. 동북아의 강국이 되기 위해 민족통합을 해야한다는 생각엔 반대한다. 강국이 무엇이 좋은가. 강국이 되어 상대를 몰이해하면 폭력이 나온다. 상대를 이해하면 평화가 된다. 충돌 가능성이 줄어드니까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격하지 말고 변화를 유도하자

(교사): 북한의 인권 문제에 학생들이 매우 민감한 것을 보았다.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

*김형덕: 북에 인권 문제가 있다는 전제를 부정하면 안 된다. 다만 실제로 문제가 있더라도, 우리의 기준으로 규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도 6,70년대에 그랬다. 그들의 의식과 사회·경제적 상황을 보면 열악한 인권 현실이 이해가 될 것이다. 교류를 증대하는 과정에서 우리와 접촉을 많이 하면 그들도 스스로 인권을 개선하게 될 것이다. 변화가 일도록 유도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공격을 할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내 아내의 단점만 보면 같이 살 수 있겠는가. 남북도 마찬가지다.

모든 시간이 다 끝나고 사회자 오지혜씨는 “맞아요.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통합이 오길 바래요”라고 말하면서 진정한 평화를 말하는 경계인에게 박수를 보내자고 했고, “통합을 위해 저의 모든 것을 다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강연자에게 뜨거운 박수가 길게 길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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