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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터뷰 특강-거짓말] 남자의 거짓말, 남자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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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04 00:00 수정 : 2009-03-2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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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과 함께한 ‘남자의 거짓말’
“정숙하면서도 섹시하라”는 이중메시지와 언어 패권주의

▣ 김종옥 7·8기 독자편집위원

정희진씨는 일정한 팬을 몰고 다니는 스타다. 공격적인 여성학자(그는 자신이 절대로 공격적이지 않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을뿐더러, 실제로는 비굴한데다 질척대며 산다고 강조한다)로 소문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팬의 말대로 그의 ‘쉴 새 없이 쏘아대는 광범위한 대사가 중독성을 갖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남성 중심의 사회를 살천스레 말공격하는 투사일지 모른다는 선입견을 가졌다. 칠판을 앞에 놓고 무대를 오락가락 누비며 강의하는 그는 “강의로 생계부양을 해대느라 어느 틈에 칠판이 내 몸의 연장이 됐다”거나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그저 점잖아주기만 해도 페미니스트”라는 특유의 표현처럼, 너글너글하면서도 톡톡 쏘는 말솜씨를 가진 재담꾼 같았다. 3월28일 여섯번째 특강이 시작됐다.

백인, 레즈비언, ‘나’의 여성학은 제각각


그는 본인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소개해달라고 주문했다. 사회자 오지혜씨는 강연장에 오기 전 둘 사이에 가정 내에서 어떻게 양성평등을 이끌어냈는지(오지혜)와 실패했는지(정희진)에 대해 치열한 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희진씨는 오지혜씨가 투쟁해서 얻어낸 성취에 대해 부러움과 자괴감이 어우러진 찬사를 보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지닌 맹점을 파헤친 여성학자 정희진의 통쾌한 강연.

오지혜: 여성학이란 무엇에 관한 학문인가?

정희진: 기존의 인식 체계는 남성의 위치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남성의 삶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 기존 모든 학문의 언어다. 여성학은 여성의 삶에 기반한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학문이다. 서구 백인 여성에게는 그들의 여성학이 있고, 제3세계 여성, 흑인 여성, 장애인 여성, 레즈비언 여성에게는 또 다른 여성학이 있겠다. 나는 나 자신의 사회적 기반에서 보는 여성학이 그 내용이 된다.

오지혜: 자생적 페미니스트와 제도 안 여성학자가 다른 점이 있다면?

정희진: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지식은 권력이 아닐까.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삶의 현장이 고통이고 인내다. 모든 앎은 해방이라는 의미에서(무지 때문에 고통스럽고, 고통을 사회화할 수 없을 때 더 고통스럽다), 여성학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주류적 시각을 갖는 것이고, 거기에는 치유와 쾌락이 따른다. 여성학자가 현실을 변화시키려고도 하겠지만, 다른 학문에 여성학의 시각이 들어갈 때 학문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그는 ‘말’의 정치학을 논하며 언어의 권력 관계를 파헤치는 것에서 주제 강연을 시작했다.

말을 ‘거짓말’과 ‘참말’로 나누려고 하지 말자. 둘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맥락적, 유동적, 경합적이다. 모든 언어는 정본이나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번역’이다. 여성학은 ‘기존 경계의 언어’를 넘어서는 다른 언어와 그에 따르는 인식 체계를 갖는 거다. 그것으로 기존 (남성의) 언어를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낙후’시켜버리는 전술을 가져야 한다.

이번 인터뷰 특강 때 <한겨레21>이 나에게 ‘페미니스트도 불편해하는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했는데, 엄청 스트레스 받았다. 페미니스트 하면 다들 무서워하고 싫어하지 않나.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폭소) 최근 내 책 <페미니즘의 도전>이 기대 밖으로 많이 팔렸다. 주변에서 “야, 성공해서 좋겠다”고들 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공포스럽다. 남자가 출세하면 여자들이 붙고 다른 남자들은 그에게 아부한다는데, 여자가 출세하면 남자는 떠나고 여자들은 시기한다질 않나. 여성들은 이런 종류의 ‘성공 공포증’이 있다. 그만큼 여성이 가진 권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안의 언어가 사유의 변화를 이끈다

남자의 거짓말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이중메시지(double binding message)와, 언어를 정의하는 자로서의 거짓말과 폭력이 그것이다. 정숙하면서도 섹시하라는 주문이나, 여성을 욕망하면서도 비난하는 태도라든가 이런 것들이 이중메시지다. 언어를 정의하는 자의 폭력을 보자.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의 사회에서는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있다. 언어를 생산하는 자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게 된다. 언어는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 여성주의는 기존 언어의 주체인 남성의 거짓말을 상대화, 맥락화, 부분화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우리가 쓰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남성·중산층·젊은이·비장애인·이성애자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말 안에 이미 여성을 배제하거나 여성 비하적이어서, 성별에 따른 역할 분리(차별)를 규정하고 당연시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말은 사유, 행위와 이어진다. 예를 들어 성폭력범이 자기의 행위는 진짜 성폭력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그게 거짓말이 아니다. 그저 ‘사랑해준’ 거니까.

덕분에 객석에서는 쉴새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서로의 다양한 위치가 이미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통합 가능한 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추석에 나와 내 남편으로 간주되는 자와 내 여동생과 내 여동생의 남편이라 주장하는 자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전남 함평에서 총기난사 사고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당시 나는 가정폭력 상담을 하며 책도 쓰고 있었는데, 즉각적으로 “저건 가정폭력 문제다”라고 말했다. 엄마가 총질하는 경우는 없으니까.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에서 일하던 여동생은 “저건 군사주의 문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수산업이 어떻고 저떻고 줄줄이 읊었다. 여동생의 남편은 “무슨 소리냐, 저건 명백한 전라도 차별이다”라고 했다. 한국방송이나 문화방송의 의사결정권자들이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에 꼭 전라도에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대서특필한다는 거다. 우리 셋 다 자기 처지에서 같은 사안의 본질을 다르게 바라본 거다. 내 남편? 그는 이랬다. “시끄럽다. 조용히 텔레비전 좀 보자!” (좌중 박장대소) 이 남자는 자기가 아쉬울 게 하나도 없으니 이런 뉴스가 그냥 뉴스일 뿐 특별히 맥락과 구조를 분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갖고 있다. 자기 처지에서 자기의 말을 갖고 사회화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대안의 언어를 만들어 그를 통해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자.

말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윤락에서 매춘으로, 다시 매매춘에서 성매매로 변화해왔다. 언어의 생산과 사용은 그만큼 정치적이며 말의 변화 자체가 인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폐경보다는 ‘완경’, 처녀막이 아니라 ‘질주름’, 삽입성교보다는 ‘성기결합’, 미혼이 아니라 ‘비혼’이 듣기에도 좋고 상호적이지 않은가.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기존의 성차별적 언어들이 개선되고 있다. 이는 사유 방식의 변화까지 동반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폭소 속에서 주제 강연이 끝나고, 질문자들의 손이 무수히 올라갔으나, 언제나처럼 시간에 쫓겼다. (다음부터는 특강을 2시간이 아닌 3시간으로 늘리는 게 어떨까 하는 의견들이 꽤 있었다.)

대안의 언어가 사유의 변화를 이끈다

질문: 요즘 매스컴에서 심심찮게 ‘여고남저’ 현상을 거론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희진: 우리 사회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개별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남녀 간에 우열은 있지 않다. 현실적으로 사회가 남성 중심으로 이미 설정돼 있는 상황이라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이 더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그래도 실제로 그게 사회적 지위로 연결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질문: 남성들에게 페미니스트적 지침을 준다면 어떤 것이 있겠나?

정희진: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예전에 ‘가정폭력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강의 요청이 있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대책은 없다.” 나는 사실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 방식을 달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질문은 오히려 질문자 자신에게 해보아야 할 듯하다. 다만 우리가 당연하다, 정상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을 의심해보고 떨어져서 보는 인식을 가지는 게 그 시작이 될 거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어떻게 세상을 볼지 깨달아가요”

어느 수강생이 <한겨레21>에 쓴 편지

<한겨레21> 안녕하세요! 여섯 번째 강의를 듣고 있는 김은영이라고 합니다. 처음 강의가 일곱 번이라고 들었을 때는 신청하면서도 한편으론 ‘이걸 다 언제 듣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강의를 마치면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니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펜을 들었습니다. 강의를 한 차례 한 차례 들으면서 저의 지성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어요. ∧∧

전 <한겨레21> 독자도 아니고 한겨레신문사가 하는 활동에도 무관심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이 특강을 신청하게 되어 정말 값진 경험을 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똑 부러지게 명쾌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을 보며 ‘아! 이게 바로 한겨레 독자의 모습이자 한겨레의 영향력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속으로 나도 한겨레를 좀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과연 이 일곱 번의 강의가 나에게 어떤 성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앞으로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깨달아가는 것 같아요. 왜 매번 좌석이 매진됐는지 알 것 같군요. ㅎㅎ 앞으로 <한겨레21> 뒤에서 힘이 닿는 대로 응원하겠습니다.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 미래를 향한 곧은 발걸음. 변함없이 힘차게 달려가길 기원하겠습니다. P.S: 다음 특강도 기대하겠습니다!

2006년 3월28일 김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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