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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터뷰 특강-상상력] 당신의 가슴속에 세계지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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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3 00:00 수정 : 2009-03-2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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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특강/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1]

한비야와 함께한 ‘고통을 나누는 상상력’… “내 행복과 남의 행복을 일치시켜보세요”

▣ 곽동운/ 9기 독자편집위원
▣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걸어서 세계일주를 한 오지 여행가에서 이제는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직함’이 바뀐 한비야씨의 인터뷰 특강은 시종일관 뜨거웠다. 한비야씨도 대단했지만 연세대 위당관을 가득 메운 400명의 청중도 대단했다. 돈을 내고 강연을 들은 기억이 까마득하다고 실토한 한비야씨는 “어쩌면 우리는 이런 강연에 목말라하는지 모르겠다”며 청중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한비야씨의 ‘고통을 나누는 상상력- 긴급구호의 빛과 그림자’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들은 꿈과 세계지도와 마음이었다.

오지로! 혼자서만! 그 나라 사람들처럼!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천지가 세계지도였어요. 식탁보도 세계지도였고 티셔츠도 세계지도가 그려진 것이었죠. 그래서 식탁에서 아버지가 ‘비야야 인도에 밥풀 묻었다, 페루쪽이 찢어졌구나’ 하셨죠. 그렇게 어려서부터 세계지도를 보아왔으니 자연스레 세계가 다 이웃으로 여겨졌죠. 그러면서 나중에 꼭 그곳들을 가보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답니다. 세계가 다 이웃인데….”

한비야씨는 ‘아버지의 사랑은 세계지도’라고 말했다. “여러분의 세계지도는 어떻습니까? 혹시 미국이나 일본, 중국 같은 큰 나라 이외는 없지 않습니까? 반면 우리나라는 너무 작게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저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를 ‘베이스캠프’라 말합니다.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한 베이스캠프. 세계지도를 잘 보기 위해서는 세계를 느껴야만 합니다. 그러면 큰 나라뿐 아니라 아프리카나 중동, 남미 같은 지역들도 온전히 다 볼 수 있게 됩니다.”

오지 여행가였던 한비야씨가 어떻게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을 맡게 되었을까? 해외 배낭여행을 많이 한다고 구호 활동가가 되는 건 아닐 텐데. 오히려 해외를 다녀와서 제1세계에 대한 동경이 커진 사람들도 간간이 봤다. 한국 사람들이 배낭여행을 선진국 위주로 다녀서 그런가?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한비야씨. 그는 아프가니스탄 여행을 통해 긴급구호 활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떤 꿈들을 가지고 계시나요. 저는 꿈만 꾸는 사람과 그 꿈을 향해 오늘도 노력하는 사람으로 세상을 구분합니다. 사실 저도 많은 꿈을 꾸었어요. 수많은 꿈들 중에는 지금 실현된 게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것들도 상당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늘 이룩한 꿈들은 그 목표를 위해 매일같이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뎠던 것들입니다. 반대로 못 이룬 꿈들은 이제껏 한 발짝도 떼지 못했던 것들이죠.”

내 피를 끓게 하는 것은

그래서 한비야씨는 어릴 적 꿈이었던 도보 세계일주를 떠난다. 배낭을 메고 한 발짝 한 발짝.

“제가 세계여행을 할 때 세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오지로만 다닌다, 혼자서만 간다, 그 나라 사람들처럼 먹고 잔다. 이런 여행은 솔직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내가 좋아서,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의 일이었어요. 말라리아 약을 먹었는데, 글쎄 부작용이 생겼지 뭡니까. 약을 남용한 탓이었죠. 처음에는 머리카락이 빠졌어요. 그러고는 까닭 없이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그 나라 사람이 ‘왜 당신은 항상 슬프냐’고 할 정도였어요. 그러다 결국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간이 나빠져서 2주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그런 극한의 상황이었음에도 그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건 그게 제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지여행가 한비야씨가 긴급구호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극적이었다. 빵 때문이었다. 한 소녀가 준 빵.

“여행을 하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무얼까?’ 하는 생각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내 피를 끓게 하는 게 뭘까?’ 그러다 하느님께서 큰 것을 보여주셨죠. 제가 가톨릭 신자거든요. 1996년 당시 탈레반 정권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의 한 난민촌에서의 일입니다. 대인지뢰 때문에 다리가 잘려서 목발을 짚은 소녀가 제게 빵을 건네더군요. 잠시 망설였죠. ‘이 소중한 빵을 받아서 이 소녀의 마음을 기쁘게 할 것인가, 받지 않아서 소녀의 한끼를 채울 것인가?’ 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소녀 앞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소녀는 맑게 웃더군요. 주위에 있던 아이들도 환호성을 질렀죠. 그 녀석들에게 제가 진짜 이모가 된 것이었죠.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꼭 돌아오겠다고, 돌아와서 너희들을 돌보겠다고.”

첫날인 3월14일엔 400여명이 찾았다. 보조의자 70여개를 놓고도 모자라 서서 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필자의 코끝이 찡해졌다. 한비야씨가 소녀의 빵 하나 때문에 긴급구호에 나섰다는 게 극적이었을뿐더러 장소가 아프가니스탄이었다는 사실이 그런 감정을 더했다. 당시 집권 탈레반은 혹독한 여성 탄압 정책으로 악명 높았기에 외국인, 그것도 여성이었던 한비야씨가 아프가니스탄 여행을 통해 긴급구호 활동을 결심했다는 건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였다.

“어렵사리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5년 뒤인 2001년에 다시 아프가니스탄, 바로 그 소녀 동네에 가서 긴급구호 활동을 하게 됐답니다. 그런데 제가 입국하고 바로 그 다음날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있었습니다. 약속을 못 지킬 뻔했죠.”

평소 다른 사람들한테 아쉬운 소리를 못한다는 한비야씨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강연 자리에서는 ‘돈 내놔라’ 하는 소리를 많이 한단다. 그 이유도 장내를 매우 숙연하게 했다. 강연이 끝나고 사진보기 시간이 있었는데, 정말 뼈밖에 없어 크게 울지도 눈을 뜨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2주간 영양죽을 먹이면 눈을 떠서 구호활동가와 눈을 마주친다고 한다. 그럼 그 아이는 산다는 거다. 그렇게 눈을 맞춘 아이는 생명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양죽 2주일 분량,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영양죽 가격이 만원이란다. 가난하지만 내 주머니에도 만원은 있는데.

사회자 김갑수씨는 이토록 역동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한비야씨에게 “그 동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경쟁과 자본에 물든 세계지도를 그리실래요, 아니면 연대와 평등을 꿈꾸는 세계지도를 그리실래요?” 열강하는 한비야씨.

“행복이 뭘까? 여행 중에 그런 고민들을 많이 했죠. 전 행복이, 내가 원하는 것과 하는 일이 일치되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 일이 바로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이었지요. 긴급구호 일을 하면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삶이기에 그럴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내 행복과 남의 행복이 일치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과의 대화가 있었다. 말 그대로 ‘질문 공세’를 받았다. 자신을 음악 교사로 소개한 여성은 “긴급구호에 필요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다.

“의료 전문가, 상수도를 놓는 수질 전문가 등 여러 분야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마음입니다. 타인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음악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난민 어린이들에게 심리치료가 필요한데 그때 음악이 필요하죠.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데 음악이 쓰이는 거죠.”

중국어 공부는 ‘탈북자 문제’ 때문

북한 구호에 관련된 질문도 나왔다.

“제가 한때 중국어 공부를 했는데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가 이북 출신이라 저희 집도 이산가족입니다. 탈북자 문제는 정치적으로 얽혀 있어서 고민스런 부분이 있어요. 제가 구호팀에서 식량 배급 담당인데, 난민촌에서 식량을 나눠주면서 북쪽 아이들을 많이 생각합니다.”

사실 ‘고통을 나누는 상상력- 긴급구호의 빛과 그림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 특강은 세계지도와 꿈에 대한 내용 일색이었다. 돈 내고 강연 들은 사람들은 한비야씨에게 속은 걸까? 아니다. 긴급구호라는 게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아이들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타인과 함께하는 마음은 꼭 필요한 것이고, 그런 사람일수록 온전한 세계지도를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연장을 나서면서 필자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떤 마음의 세계지도를 그려나갈 것인가? 경쟁과 자본에 물든 세계지도를 그릴 것인가, 아니면 연대와 평등을 꿈꾸는 세계지도를 그릴 것인가. 답은? 두말하면 잔소리지!


“말이 살아있어요”

[인터뷰 | 익산에서 열차 타고 오는 수강생 김인휴씨]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3월16일 서울 연세대학교 캠퍼스의 대형 강의실. 스윽 살펴보니 새내기, 직장인, 노인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이 앉아 있다. 김인휴(53)씨도 무심히 흘러나오는 음악을 등지고 자리를 잡아본다. 자료집을 뒤적이며 어색하게 강의 시작을 기다린다. 하지만 낯가림은 잠시, 사회자의 등장에 청중의 박수가 터지면서 이내 장내 분위기는 달궈지고, 그도 살아 있는 말들의 시간에 취하기 시작한다.

전북 익산시 원광대학교에서 시각정보디자인을 가르치는 그는 뒤늦게 알아서 놓쳐버린 지난해의 ‘인터뷰 특강’이 올해도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 얼른 참가 신청을 했다. 익산과 서울, 강단과 객석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고 ‘3월의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회와 문화에 대한 상상력은 나이를 불문하고 필요한 거 아닙니까.” 빠르게 변하는 주변 환경이 아찔한 ‘선생님’은 스스로 수혈을 하기로 했다. “제 자신에게 아쉬운 게 많아요. 그래서 특강이 뭔가 새로운 걸 보여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오게 됐죠.” 연구년의 아까운 시간을 쪼개어 참석하게 된 사연이다.

서울행 KTX 표를 끊고 올라와 다시 밤길을 재촉해 익산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두번의 특강은 어떻게 다가갔을까. “역시 직접 만나니 참 좋습니다. 한비야씨, 이윤기씨 말이 살아 있어요. 강연 내용도 좋지만, 문어체는 일절 쓰지 않으면서 쉽게 공감되는 말을 사용하시니 그것만으로도 새삼스레 매료되지 않을 수 없어요.”

하지만 연단과 객석이 완전히 분리되면서 ‘동네사람과 정담을 나누는’ 인터뷰 특강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단다. “이윤기씨도 더 편안한 분위기에선 남다른 얘기를 해주실 것 같더라고요.” 질문자들의 마이크도 잘 챙겨달라고 덧붙인다.

적지 않은 세월을 흘려보내고 난 지금도 세상에 귀를 열고 인생의 화살표를 재조정하려는 김인휴씨에게 여섯번의 특강은 어떤 지평을 보여줄 수 있을까. “특강은 오감의 동시적 표출”이라는 그의 찬사에 보답하기 위해 인터뷰 특강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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