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태의 인터뷰 특강’ 보고서… 이해관계 초월한 전선취재 위해선 소속 언론사조차 배반할 수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상에 올라온 그가 바로 〈한겨레21〉에서 아시아를 온전히 아시아인의 눈으로 보자고 언론인들과 민주화운동가를 하나로 묶어 ‘아시아네트워크’ 결성을 주도했던 정문태 종군기자라는 사실 말이다.
그는 ‘람보’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언제부터인가 ‘람보’를 종군기자 상으로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정부군을 피해 첩첩산중에 숨어들어 가장 잔인한 살해로 기록된 ‘아체의 통곡’(2003년 7월 466호 표지이야기)같은 분쟁 기사도 담담히 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 본 정문태 기자는 왜소해 보이는 마른 체구에 뿔테 안경까지 써 영락없이 인텔리겐치아처럼 보였다.
이런 놀람으로 시작된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여섯 번째 강의, ‘정문태 종군기자의 전쟁취재의 거짓말-전선취재 17년의 비망록’은 전쟁과 죽음의 그림자라는 무거운 주제를 하나씩 들추며 팽팽한 분위기로 출발했다.
청중들이 ‘종군기자’라는 낯선 직업에 갖는 호기심 때문인지 역시 이야기의 첫 단추는 정씨와 종군기자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1980년 중반에 민예총 활동을 하며 연극연출을 하기도 했다. 1988년 연극판을 떠나 외신에서 정치를 취재하다가 정치의 가장 극단적인 행위인 전쟁이 일어나는 전선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씨가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 사건은 1988년 ‘랑군의 봄’이었다. “버마 민주항쟁 이후 1만여명의 버마 학생들이 타이 국경에 쫓겨가 있었던 때였지요. 그곳에서 버마학생민주전선 혁명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다양한 민족해방 혁명가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분쟁 지역을 취재하는 종군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정씨는 기성 언론이 쓰는 ‘종군기자’라는 표현에 강연 내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종군기자(從軍記者)란 한자 어휘는 군대를 따라다니며 전쟁을 취재한다는 뜻으로, 군국주의 냄새를 풍기며 군대와 기자를 복속관계로 보이게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 세 나라만이 유달리 이렇게 표현한다고 한다.
실제로 과거에는 종군기자가 자국 군대의 승전보를 울리는 전령사나 전사(戰史)관 노릇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참된 의미는 전쟁의 배경을 파는 탐정, 곧 군대를 감시하며 전쟁을 취재하는 것이며, 이것이 국민들이 부여한 진정한 임무다. 이러한 현대적 의미로 보면 ‘종군기자’라는 표현보다는 ‘전쟁기자’ 혹은 ‘전선기자’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전쟁기자는 객관적인 자세로 정의로운 편에 서서 국가의 이해관계를 떠나 취재를 해야 한다. 곧 어떤 종파, 인종, 정부도 벗어나고 심지어 돈 들여 파견한 소속 언론사까지도 배반하면서 시민들 편에 서야만 한다.
세계 최초의 종군기자는 〈더 타임스〉의 월리엄 하워드 러셀이다. 그는 1853년 러시아와 프랑스 등이 벌인 크림 전쟁이 터지자 15개월 동안 전쟁기자로 참가했다. 당시 전쟁터를 누비던 러셀과 동료 기자들은 프랑스 간호사들의 활약을 보고 “왜 우리에게는 자비의 수녀들이 없는가?” 하며 탄식 어린 기사를 실었는데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바로 이 기사를 읽고 전쟁터에 간호사로 지원했다고 한다. 또 유명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1차 세계대전 때 〈토론토 스타〉 기자로 그리스와 터키전을 취재했으며, 스페인 내전 때에는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이후 그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무기여 잘 있거라〉는 당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버마 · 스리랑카에서 입국 거부당해
그 뒤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전쟁기자들의 활약은 엄청나게 커진다. 특히 고대와 현대를 가를 만큼 전쟁보도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계기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 기간에 전쟁기자들의 자유로운 취재는 자국이 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 교전국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군인들을 보고 정부를 비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초의 반전운동도 이때부터 벌어졌다.
반면에 전쟁기자들이 적에게 이로운 정보를 제공한다며 스파이로 몰려 총살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실제로 전쟁터에서 취재 중 목숨을 잃는 기자들이 생겨난다. 또 추악한 전쟁에 맞선 정의로운 취재에, 본격적인 전시언론 통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전쟁기자가 정부나 군대의 전선 통제로 취재가 어려운 약점을 악용해 비판을 못하게 하고, 국가와 정부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해 나팔수 노릇만 강요한다. 정문태 기자도 실제로 버마와 스리랑카 그 밖의 몇몇 나라에서는 입국 자체를 거부당하고 있다.
일례로 이번 이라크전에서 미 국방부가 보여준 종군기자들의 동행취재 프로그램 ‘임베드’(embed)는 전쟁기자를 말살하고 전쟁의 실상을 알리기 어렵다. 임베드는 참흑한 전쟁을 안방에서 보는 스포츠 중계 수준으로 만들어버렸다. 오폭으로 민간인들을 살상하는, 전쟁의 잔악함을 알리는 임무는 온데간데없고 미국의 일방적 시각에서, 취재 나와 경기를 마친 선수들을 인터뷰하듯 군인들의 시시콜콜한 감상문 쓰기에 분주했다.
숨죽여 조용히 듣던 강연이 끝나고 자유토론 시간이 되자 어느 강연보다도 진지한 질문이 쏟아져나왔다. 먼저 그가 아시아 분쟁 문제, 특히 동남아시아에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정씨는 “우리나라 에너지 수급량의 80%가 동남아 길목을 경유해서 들어오고 또 경제적으로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곳이라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답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종군기자라도 죽음을 뛰어넘지 못한다. 다만 그 순간을 잠시 잊어버릴 뿐이다. 종군기자들은 기질상 배 타는 선원들과 비슷하다고 한다. 한번 배 타고 항구를 떠나면 언제 돌아올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기자로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인물로 얼마 전 이스라엘군의 헬기 공습으로 숨진 하마스의 최고지도자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Ahmed Yasin)을 꼽았다.
에라스무스는 ‘가장 불리한 평화도 가장 정의로운 전쟁보다 낫다’고 했다. 이는 전쟁의 비참과 불행을 표현하는 가장 극단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런 분쟁 지역과 전쟁의 한복판에서 죽음의 서약서를 쓰고 쫓아다니면서 진실의 목격자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전쟁기자가 커 보였던 것은 이날 강연을 들은 모든 이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최일우/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

정문태 기자는 강연 내내 "군대를 따라다닌다"는 의미의 '종군기자' 개념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사진/김진수기자)

'심각하게' 또는 '편안하게'. 방청객들의 다채로운 표정들.(사진/김진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