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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특강-교양]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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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25 00:00 수정 : 2009-03-2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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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랑스 논객’ 홍세화의 인터뷰 특강 보고서… 왜 집안에 아픈 사람 있어도 ‘무상의료’ 생각 안 하나

박운양/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
“이미 두 차례의 인터뷰 특강을 통해 아마추어 사회자와 프로 청중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형식에 관계없이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자리를 만들자는 사회자 김갑수씨의 제안에 모두들 웃음을 가득 채운 얼굴로 화답하면서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씨와 함께하는 인터뷰 특강은 시작됐다.

“나는 사민주의자로 만족한다”

지난 3월12일 대통령 탄핵소추를 ‘한·민·련’이 강행하면서 여의도, 광화문 그리고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퍼져가는 탄핵반대 촛불집회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모두들 ‘톨레랑스를 강조하는 부드러운 진보 논객’ 홍세화씨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진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하는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그는 "정치적 인간보다 문화적 인간이 되자"고 강조했다.(박승화 기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홍세화씨는 수구세력의 도발이 있었고 그 후폭풍이 일어났으며, 이제 진정한 보수와 개혁 세력이 다 함께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반수구 연합세력이 어떻게 결집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진정한 보수세력이 수구세력에 끌려다녔던 그동안의 관성을 깨고 합리적 보수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수구세력은 어제가 좋았던 사람들, 보수세력은 오늘이 좋은 사람들, 진보세력은 내일이 좋은 사람들로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우리 역사가 더 이상 과거에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된다고 볼 수 있다.


홍세화씨는 그가 프랑스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사회주의자일 것이겠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자신은 ‘사민주의자’로서 만족한다고 밝혔다. “소수가 혁명적인 생각을 갖는 것보다 다수의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것이 더 혁명적”이라는 그람시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가 사민주의자로 만족하는 것은 이상사회를 미리 그려놓고 진보운동을 하기보다는 오늘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을 덜어내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헌법 제1조가 어떻게 우리의 의식 속에서 배반당해왔는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본격적으로 화두를 던졌다. ‘Republic’이 ‘공적인 일’을 어원으로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은 모든 사회구성원의 ‘공공성’과 ‘공익성’의 확보에 있다. 따라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는 사회 공공성 확충을 요구한 공화주의 이념의 당연한 반영일 뿐이다. 이를 요구하는 것을 ‘사회주의적 발상’이니 ‘좌파적 발상’이니 하는 것은 기득권 세력이 민주공화국의 기본인 사회 공공성·공익성에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뜻하며, 그들이 분단 이래 반세기 동안 민주공화국을 철저히 배반하면서 사익을 추구해왔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누구나 잘 알 듯이 남한에서 친일파로 불리는 일제 부역세력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은 청산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정치·경제·언론·교육·종교 등 모든 부분에서 헤게모니를 쥔 한국 사회의 지배세력이 되었고,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이용해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 민족적 정통성도 없는 지배집단에게 스스로 복종하는 의식, 다시 말해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냉전의식, 안보의식, 질서의식, 친미사대의식, 물신숭배의식, 지역감정 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의 탄핵 정국에서 이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탄핵 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한나라당의 두 의원이, 한명은 친일진상 규명법을 누더기로 만든 장본인이고, 다른 한명은 유신헌법을 기초한 의원이라는 것이다.

국립대학만이라도 평준화를

한국 사회에는 분명 집안에 병자가 생겼을 때, 병 걱정에 앞서 돈 걱정을 해야 하는 존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존재들은 ‘무상의료’에 비상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존재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비상한 관심을 갖기는커녕 무상의료에 의혹을 제기하거나 불안해하면서 스스로 거리를 둔다. 존재의 요구조차 스스로 거부하는 의식, 그것은 무상교육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배집단이 반세기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와 같은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 대안은 무엇인가? 홍세화씨는 ‘탈의식화’라고 말한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해 비판적 의식과 안목을 갖고 있는 사회구성원은 어느 시점에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의식을 반전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즉, 우리가 말하는 의식화는 탈의식화를 전제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 진보란 무엇인가? 진보란 사회진보이며, 사회진보는 사회구성원들의 의식 변화로 이뤄진다. 그러나 진보의 길은 쉽지 않다. 사회 구성원의 의식은 자기 배반의 의식이라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진보는 그야말로 느린 걸음이다. 그러나 역사가 가는 길, 묵묵히 가야 할 길, 참 어렵고 때로는 물러서는 것처럼 보여도 멀리 보면 전진하는 길이다. 진보의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진보의 길인 것이다.

대략 12명에 이르는 청중들의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어떻게 대학생활을 알차게 보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대학 새내기의 질문에는 적어도 대학생으로서 ‘무식함’을 벗어나려면 한국 현대사 공부를 철저히 할 것을 당부했다. 한국 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골칫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교육 문제에는 국립대학만이라도 먼저 평준화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부동산으로 인간이 평가되는 천박함

말미에 사회자는 현재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홍세화씨는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와는 단호하게 결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 외의 중요한 현안들인 미국과의 관계나 파병, 노동 문제에서는 왼쪽 깜빡이 켜고 오른쪽으로 가버리는 모습이 너무 많이 드러났다면서 헌재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 역사 공부를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다.

인터뷰 특강 내내 그가 곳곳에서 힘을 주어 강조한 것이 있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대한민국 1%”라는 부동산 광고가 버젓이 오르내리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부동산으로 인간이 평가되는 현실의 천박함을 깨달아야 하며, 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에 저항하는 항체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진보의 길에 기꺼이 함께하려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격 요건으로 홍세화씨가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톨레랑스를 강조하는 부드러운 진보 논객 홍세화와의 인터뷰 특강을 정리하면서 나 스스로 진보에 대한 물음을 던져보게 된다. 그것은 거창한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제의 관성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오늘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단 한번뿐인 삶에 대해 진지하게 자기를 표현하며 자기 존재의 미학을 부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 모든 긴장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엄마, 열심히 듣고 오세요”

[인터뷰/ 열혈 수강생 독자 최옥순씨]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박승화 기자
강연 시간 내내 방청석 뒤에서 손을 올렸지만 사회자는 야속하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나 같은 열혈 청강생을 외면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기엔 열혈만으로 200명을 넘어버린 방청석의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

후방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주인공은 최옥순(41)씨. ‘인터뷰 특강’을 통해 자신의 ‘세상보기’에 새로움을 덧입히는 재미에 빠진 그녀는 당연히 현재 스코어 ‘전출’이다. 의류업에 종사하랴,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을 돌보랴 쉽지 않은 일정에도 덥석 신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평소 깊이 공감했던 필자들의 생각을 ‘글’이 아닌 ‘대화’로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이나 칼럼을 통해 전해받는 일방적 지식에서 부족함을 느꼈다는 그는 “이렇게 직접 만나 생생한 이야기를 나누면 집중력 있게 제 생각을 검토할 수 있고, 평소 궁금했던 사항도 질문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라며 활짝 웃는다. 애초 ‘인터뷰 특강’이 바랐던 ‘거침없는 생각들의 교류’에 적극 동참해주는 고마운 ‘교류자’이다.

돌이 된 아이를 돌보느라 함께 참석하지 못한 최옥순씨의 여동생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인터뷰 특강’으로 아쉬움을 달랬다고 한다. 특히 첫 시간에 방영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강연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베트남전에 반사시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좋았다고 한다. 이에 여동생은 한 교수의 글을 읽겠다고 <한겨레21> 정기구독 신청까지 했단다.

“다음엔 조금 더 현장 신청과 강연 장소에 신경써달라”는 그녀는 악조건에도 “엄마, 평소 듣고 싶었던 이야기니까 열심히 듣고 오세요”라는 아들의 응원에 힘입어 마지막 그날까지 전출할 예정이다. 적극적인 교류자들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지식의 향연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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