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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터뷰특강-교양] 당신은 노동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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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25 00:00 수정 : 2009-03-2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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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의 인터뷰 특강 보고서… 경찰관과 법관 · 변호사도 노동조합 깃발 세우는 날 올 것

최일우/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
최근에 개봉한 한국 영화 제목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처럼 노동운동판의 ‘감초’인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은 가장 신뢰받는 노동문제 강사다.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네 번째 강의 ‘너희가 노동문제를 아느냐’에서 하씨 강연의 백미를 볼 수 있었다.

지난 2년8개월 동안 <한겨레21>에 연재한 ‘하종강의 진짜 노동자’에서 그가 만났던 수많은 진짜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이번에는 직접 만나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청중들에게는 설렘이었다. 그러나 자칫 대학생이나 ‘이태백’들에게는 가장 무거운 주제일 수도 있었다.

'너희가 노동문제를 아느냐'는 주제로 강연을 한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그가 만났던 '진짜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박승화 기자)

광화문에 안 가서 고맙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탄핵안 가결 이후 ‘탄핵무효, 민주수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구호가 전국 길거리를 뒤덮은 긴박한 상황인지라, 그동안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던 인터뷰 특강 강연장에도 간간이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하종강씨에게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같이 듣기로 했던 다른 독자편집위원조차 강연을 포기(?)하고 광화문 집회장으로 발길을 돌렸으니까 말이다.


강연 전에 만난 하종강씨는 노동문제에 관한 일을 직업으로 택한 뒤 2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노동자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요즘처럼 조심스럽고 어려운 시기가 없었다고 하소연한다. 이런 우려 속에, 그는 강연을 시작하기 앞서 “광화문에 가지 않고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공손하지만 의미심장한 첫인사를 했다.

최근 텔레비전을 보면 흉흉하기만 하다. 수십년 생선을 팔아온 시장 상인들도 손님이 없어 오후 4시가 넘도록 개시를 못할 정도라고 하며, 지방은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거나 폭설로 축사가 붕괴되고, 그나마 도와주던 전경들이 탄핵에 찬성한 국회의원 신변 보호를 위해 서울로 차출됐다고 한다. 이 기막힌 현실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 주장은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다. 하종강씨는 장애우나 여성의 권리가 확대되는 것이 우리 사회 전체에 유익한 진보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권리가 확대되는 것은 사회 전체에, 특히 한국 경제에 해롭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현상은 부정한 방식으로 돈을 모으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사람들이 수십년 동안 제도권 교육과 제도 언론을 통해 노동자, 노동조합, 노동운동 등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과 그릇된 혐오감을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해온 결과다. 1300만 직장인이 존재하는 이 나라에 국민 대부분이 노동자나 그 가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도 망각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시위와 겹친 탓인지 인터뷰 특강 둘째 주에는 수강생이 조금 줄었다. 그러나 좌석은 여전히 빼곡히 찼다.(박승화 기자)
하종강씨는 파업을 준비하고 있던 조종사들에게 교육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고 한다. “조종사로 취업하면서 ‘내가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모여 파업하게 될 것이다’라고 미리 짐작했던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십시오.” “조종사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하다못해 ‘노동조합이라는 단어가 나의 인생과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라고 짐작했던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십시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단다. 며칠 뒤 구속될 것을 각오하고 파업까지 해야 하는 사람들이 수십년 동안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며, 하씨는 앞으로 우리의 전교조 선생님들처럼 경찰관도 법관과 변호사들도 반드시 노동조합의 깃발을 높이 세우게 될 것이라 했다.

‘시민법’위에 서야 할 ‘사회법’

그는 이어 최근 노동자나 노동조합에 대한 살인적인 손해배상 가압류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은 보통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민법 체계에서만 진리일 뿐, 사회법 체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생각이 기초가 되어 수백년의 엄격한 봉건사회 신분제도를 무너뜨리고 그 신념이 체계화된 것이 민법, 상법 등 ‘시민법’이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형식적으로 법 앞에 평등한 인간이 현실적으로는 평등하지 않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고, 실제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법률 체계가 요구됐다. 그래서 새롭게 체계화된 것이 노동법, 사회보장법 등 이른바 ‘사회법’이라고 한다. 법을 불평등하게 적용함으로써 평등을 구현하는 것이다. 강한 사람들의 권리는 규제하고 약한 사람들의 권리는 보호하는 것이 사회법의 이념이라 할 수 있다. 하종강씨는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재산이 수십억대인 사람이나 일당 5만원을 버는 일용직 노동자나 과속 단속에 걸리면 똑같이 3만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같이 사건을 시민법 관점으로 보느냐 또는 사회법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돈을 갚지 못하면 살을 1파운드 베어가겠다’는 계약은 시민법의 이념의 계약자유 원칙에서는 유효하지만 사회법 이념에서는 사회정의에 반하기 때문에 당연히 무효가 된다. 이러한 자본가의 논리가 21세기에 또 다른 ‘안토니오’를 만들어 힘없는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 왜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선 이런 모순덩어리 변종이 출현하게 된 것일까?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건설 과정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와 매우 달랐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중세 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민계급이 출현했다. 해방된 농노와 몰락한 영주, 숙련 노동자와 소생산 자영업자들이 모두 시민계급으로 편입됐다. 시민계급은 성실을 기반으로 자본을 축척했고, 그 물적 토대가 시민혁명을 가능하게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우리의 계획과 무관하게 어느 날 갑자기 일제 식민지라는 기형적 방식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편입됐고, 그 뒤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하고 군사독재 정권으로 이어졌다.

단병호는 모험주의자였나

한 시간 이상 계속된 강연에 이어 쉼 없이 계속된 자유토론 시간에서 처음에는 ‘노동 상담가’답게 노동법과 노동조합 결성 문제나 근로조건에 관한 질문이 많았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한 현실을 적시해, 노동조합 내에 팽배해 있는 조합이기주의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등에 관한 냉철하고 심도 있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종강씨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차별을 철폐하는 활동에 더욱 힘차게 나설 것을 주장하고, 산별노조를 건설함으로써 노동자들간의 조직 이기주의를 극복할 것을 당부했다. 또 앞으로 다가올 총선에서 최초로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마지막으로 민주노총 새 집행부를 보는 시각에 대한 질문에는 단병호 전 위원장의 민주노총이 그동안 총파업 구호를 자주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투쟁을 강제하는 절박한 상황 때문이지, 지도부가 대화와 교섭 없이 투쟁만을 일삼는 모험주의적 노선을 의도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한 지 35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존재하는 어느 사업장의 노예적 근로계약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강연의 끝을 맺었다.

“본 서약은 본인이 귀 회사에서 근무함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계약하고 그 이상의 어떠한 조건도 제시할 수 없으며 노동법을 운운할 수 없음을 서약합니다. 급여는 회사에서 정한 금액을 받으며, 물품대금을 결재받아 급여를 받으므로 결재의 지연 등으로 급여일이 늦어진다 해도 빨리 줄 것을 종용하지 않는다. 명절이나 휴가철을 맞아 상여금 지급을 절대 원치 않는다. 또 모든 식사와 식수는 각자 개인의 부담으로 하며, 어떠한 명목으로도 잡비를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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