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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터뷰특강-교양] 귀와 눈을 열면 세상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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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18 00:00 수정 : 2009-03-2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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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9일 한홍구 교수의 ‘인터뷰 특강’보고서… “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 되는 역사의 악순환을 끊자”

<한겨레21>창간10돌 기념으로 기획된 ‘인터뷰특강-21세기를 바꾸는 교양’이 지난 3월9일 서강대 동문회관 스티브김홀에서 막을 올렸다. 3월25일까지 총7회(매주 2~3회)동안 방송인 김갑수씨의 사회로 진행되는 ‘인터뷰 특강’은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속에 첫주 2회 모두 좌석매진사례를 기록했다. 첫날인 3월9일 한홍구 교수의 특강 때는 애초 예정됐던 두시간을 훌쩍 넘어 40분이 초과했음에도 모든 방청객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독자편집위원들이 1,2회 특강의 강연소감 내용을 보내왔다. 교육방송은 3월13일부터 28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 저녁10시에 특강내용을 녹화·편집해 1시간동안 방영한다. -편집자

승인/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21세기가 오고 한국 사회는 급변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얼마나 바뀌고 있는가. 바뀌는 사회를 따라가기에만 급급한 건 아닐까. 강연 자료집에 선명히 적힌 제목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생각보다 계층이 다양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부터 6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까지. 바뀌고 있는 세상을 실감하며 자리에 앉았다.

“강연이 아니라 공연을 만들자”


“우리는 강연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연을 만드는 겁니다.”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쌍방향 소통’의 공연 같은 강연을 만들자는 사회자 김갑수씨의 말에 순간 강연에 대한 부담감은 풀어지고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질문자를 고르는 사회자 김갑수씨. 한홍구 교수의 특강은 시종 웃음꽃이 터지는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류우종 기자)

‘좌절의 역사, 희망의 역사’라는 제목을 화두로 던진 한홍구 교수는 일제시대부터 학살, 전쟁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들과 이라크 파병 문제의 상관관계에 대해 강연했다. 역사적 교훈에 따르면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다시 반복되는 우리 현대사. 그 속에서 정통성을 찾고 바로잡아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한 교수는 일제 청산에 대해 아직도 부족한 감이 많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심어놓은 것들이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남겨놓은 사상, 제도, 이데올로기….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들의 여파가 더 오래 남는 법이다. 어휘들만 해도 우리가 일본어인 줄 모르고 일상에서 쓰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군대위안부 할머니의 경우처럼 일제시대에는 피해자의 입장이었다가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가해자의 입장으로 돌아서버린 우리의 역사. 베트남전 이야기가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21세기가 되면서부터라니 놀랍다. 좀더 일찍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 고민했더라면 이라크 파병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침략이 아니라 재건하러 간다”는 설득 안 되는 논리들과 “어쩔 수 없이” 국익을 위해 가야 한다는 말들이 공허하기만 하다. 정당한 전쟁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한겨레21>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다른 매체와 비교했을 때 베트남전의 아픈 역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지금까지 행동하고 있는 곳은 <한겨레21>이 거의 유일하다. 독자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베트남의 평화공원, 한국과 베트남의 어린이들이 서로 만날 수 있었던 ‘평화랑 뽀뽀해요!’, 그리고 올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평화박물관까지. 한홍구 교수는 최근 근황을 이야기하면서 ‘평화박물관 만들기’ 과정을 통해 특히 ‘생활 속의 운동’을 만들고 싶어했다. 운동을 거친 데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작 삶을 바꾸는 것은 생활 속에 있는 법이다. 한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어머니들이라고 하지 않던가. 작지만 생활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새로운 ‘깨우침의 방식’에 공감했다.

방청객들은 앞다투어 질문공세를 폈다. 질의 · 응답만 1시간 넘게 진행됐다.(류우종 기자)

너무 많은 군인과 너무 적은 월급

한홍구 교수는 이라크 파병으로 우리가 얻을 ‘국익’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말해준 사람이 과연 있었냐고. 파병 인원도 동맹 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가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베트남전의 경우 일본은 한명도 없었고, 대만은 2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를 보자. 고엽제 피해자, 전사자, 남겨진 라이따이한 그리고 민간인 학살까지 수많은 문제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4월에 있을 이라크 파병은 과연 어떤 ‘국익’을 남길 것인가.

파병 문제를 이야기하다보니 빠질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군 제도였다. ‘군대 전문가’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군 인력은 너무 많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실제 국방 예산(한해 17조~18조원)에서 인건비가 40% 이상을 차지하는데, 정작 사병의 월급은 0.8%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국군의 80%가 사병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예산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주한미군 주둔비? 아니면 국방 관련 무기 수입? 순간 무섭게 느껴졌다.

예전에 비해 세상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더 하면서 개인적으로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한국 교육제도의 개혁이다. 한홍구 교수 강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몇년 전,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근현대사는 시험에 별로 나오지 않으므로 줄 몇개 긋고 달달 외운 것이 전부였다. 과거를 성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보겠다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라며 강연장을 찾은 이유를 겸손하게 말하던 한 고등학교 선생님의 얼굴에서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한 교수가 말한 것처럼 한창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부풀어 있어야 할 10대들이 정작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한 시간 정도의 강연이 있은 뒤, 자유토론 시간은 더욱 흥미로웠다. 파병과 현 정부의 성격을 바라보는 관점, 전쟁에 감춰진 역사 이야기 등이 오고갔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아쉬웠지만, 중요한 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문제들에 공감하고 고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바꿀지를 고민한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김갑수씨의 질문에 한홍구 교수는 ‘평화박물관 10년 계획’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미 일산 대화동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시민단체 ‘아시아의 친구들’에 한개가 오픈했고, 서울에도 하나 더 오픈할 예정이라고 한다. 굳이 크지 않더라도 빈 계단, 복도, 교실 등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평화교육 운동이다. 대화와 타협의 체계가 구축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여러 가지 시각으로 논의되는 자리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중이 그동안 막혀 있던 귀와 눈을 열고 논의해간다면, 작은 기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홍구 교수의 질문에 순간 고개가 숙여졌다.

대선, 월드컵, 촛불시위 등 지난 2년간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히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21세기가 왔다. 이는 사회 스스로가 변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우리가 직접 바꾼 한국의 역사이다. 이제는 ‘무엇을’ 바꾸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바꾸느냐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급하게 먹은 음식에 체해 있던 한국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새로운 관점으로 안내해준 즐거운 강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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