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국무총리의 민선 서울시장 회고록 <행정도 예술이다>는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접목시킨 이색적인 책 제목으로 2002년 6월 발간 당시 관가(官街)의 화제가 됐었다. 책 내용은 그가 4년 동안 펴온 서울시정을 정책·분야별로 소개하는 정도여서, 행정가들이 흔히 펴내는 회고록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왜 행정이 예술인지’에 대해 설명한 대목은, 행정가라면 한번쯤 음미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행정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 …느껴지지 않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행정의 고객인 시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행정서비스는 관료만을 위한 행정일 뿐이다. 예술이 작품을 통해 감동을 주듯, 행정도 행정서비스, 정책, 사업을 통해 시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뜬금없이 현직 총리가 쓴 책을 소개하며 행정가들에게 읽기를 권하는 것은, 서울 종로구청(구청장 김충용)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두 여중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자주평화 촛불기념비’를 강제 철거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지에 대해 되돌아보게 했던 촛불집회의 의미를 담아 시민의 힘으로 건립한 기념비는 이제 안타깝게도 구청 수거물 보관창고에 처박혀 햇볕조차 쬐기 어렵게 됐다.
서울시청과 광화문 광장에서 울려 퍼지던 ‘효순이, 미선이’란 이름도 차츰 잊혀져가고 있는 요즘이지만 기념비 강제철거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임이 분명하다. 광화문 교보빌딩 주변을 지나다가 인도 가장자리에 서 있는 기념비를 발견하고 그들의 이름을 떠올려보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 서울시의 도심 혼잡통행료 징수 방침에 대해서는 야단법석인 언론들도 기념비 철거는 시시비비조차 가리지 않은 채 눈을 감아버렸다. 세상 인심이 얼마나 사나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기념비는 두 여중생의 1주기를 맞은 2003년 6월13일 건립되면서부터 불법 논란에 휩싸였다. 논란의 핵심은 종로구청이 도로법 시행령과 조례 규정을 경직된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서 비롯됐다. 관련 규정에는 ‘관리청이 도로구조의 안전과 교통에 지장이 없다고 인정한 공작물ㆍ물건(식물을 포함한다) 및 시설’에 대해서는 설치를 허가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종로구청은 보행에 불편을 주고, 기념비는 ‘공작물’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불허하고 있다. 기념비 면적은 0.5제곱미터로 공중전화 부스보다 약간 작고, 높이는 195cm로 어른 키보다 약간 크다. 평소 그곳을 지나쳐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기념비는 결코 보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기념비와 공작물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결국 종로구청은 지난 1월2일 아침 8시 새해 시무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첫 업무로 기념비를 강제 철거했다. 그것도 얼마 전부터 여중생범대위와 구청 실무자 사이에 기념비 보존을 위한 방법을 논의하던 중에 말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단체들이 2000년에 이어 또다시 낙천·낙선·당선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칠 모양이다. 다음 지방선거 때는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도 못하고 감동도 주지 못하면서 관료만을 위한 행정을 펴는’ 자치단체장들을 대상으로 낙천·낙선 운동도 벌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