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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착한 어른들은 동화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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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07 00:00 수정 : 2008-11-28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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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애들이나 보는 시시한 책이라 여기는가…동화가 주는 행복을 만끽하는 어른과 어린이

동화나 그림책을 어린이책이라고 깔보는 어른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사람들은 자녀가 초등학교 3~4학년만 돼도 “다 큰 놈이 무슨 동화책이냐”고 호통을 치기 일쑤다.

그런데 몇년 사이 동화 읽는 어른들이 부쩍 늘어났다. 이들에게 좋은 어린이책 읽기는 당연한 교양이자 즐거움이다.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는 동화책. 애들이나 보는 시시한 책이라는 편견을 깨고 함께 동화를 읽는 모임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동화읽는 모임 확산 추세

중학교 교사인 박영숙(31·서울 중랑구 면목동)씨의 새해 소망은 모든 어른들이 동화를 읽는 것이다. “첫아이(5)를 낳고 동화를 읽기 시작했는데, 동화를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화가 되는 느낌이다. 욕망과 시기심에 찌든 어른들이 새해에는 동화를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좋겠다.”


박씨는 세상일이 힘들 때면 고 이원수 선생이 쓴 동시 ‘겨울 물오리’를 떠올려본다. “얼음 얼은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 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그는 이 동시를 읽으면 세상의 어떤 찬바람도 무섭지 않는 자신감이 솟는다고 한다.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어린이도서관.
함께 동화를 읽는 각종 모임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전국 각 지역 도서관, 아파트단지 등에서 저절로 생긴 동화 읽는 모임은 셀 수 없이 많다. 이 중 어린이도서연구회 지역 모임인 ‘동화읽는 어른’ 모임이 유명하다. 이 모임은 1993년 안동·시흥·광명 등에서 시작해 전국 110개 모임에서 4100명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창립 10주년을 맞은 이 단체는 ‘우리 아이에서 온 세상 아이로!’란 기념행사도 했다. 내 아이에게 좋은 책을 골라주기 위해 시작한 모임이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가 사는 세상과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에게까지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

최현수(38·서울 성북구 보문동)씨도 동화를 즐겨 읽는 어른이다. 그도 예전에는 동화는 애들이나 보는 시시한 책쯤으로 생각했다. 그는 3년 전부터 아이들(8·6살)에게 책을 읽어주다 동화의 재미에 끌렸다.

최씨는 동화를 얕보는 어른들에게 <돼지 책>(앤서니 브라운 글·그림)을 권한다. 최씨는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은 간결하고도 재치 있게 세상의 권위와 편견을 비틀어서 어른들이 봐도 무릎을 칠 정도다. <돼지 책>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여성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가족 현실을 꼬집고 있다”고 말했다.

<돼지 책> 표지에는 우울해 보이는 엄마 등에 ‘어부바’한 아버지와 어린 아들 2명 등 남자 3명이 활짝 웃고 있다. 책을 펼치면 두 아들과 아버지 등 남성 3명은 매일 아침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먹고 등교·출근했다 저녁이면 또 밥 먹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 당연히 가사 노동은 100% 엄마 몫이다.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다림질한다. 어느 날 저녁 엄마는 “너희들은 돼지야”란 메모를 남기고 사라진다. 엄마가 없어진 뒤 세 남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들의 모습도 지저분한 돼지처럼 변해갔다. 책 마지막에서 세 남자들은 집안일을 나누어 하면서 다시 행복해진다.

교보문고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는 어린이들. 그림책이나 동화책은 학습도구가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동화=교훈’ 도식 잊어라

그런데 맑고 티 없이 커야 할 어린이들이 이렇게 ‘삐딱한’ 책을 봐도 될까. 어른들의 걱정과 달리 정작 아이들은 <돼지 책>을 보면서 깔깔댄다. 앤서니 브라운이 어른들 관점이 아니라 아이들의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동화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어린이 문학이 어린이에게 권선징악이나 바른 생활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동화=교훈’ 도식을 고집하는 것은 동화를 아이의 눈이 아니라 어른의 눈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겨울방학이면 부모들은 집에서 아이들에게 책 한권이라도 더 읽으라고 강요한다. 책을 많이 읽어야 나중에 논술이나 수능 등 대학입시에서 유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책이나 동화책은 학습도구가 아니다. 어린이책을 통해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어휘력을 늘리기 위해 매달리지 말고 아이들이 책을 즐길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가 책을 읽을 때마다 ‘이 글자가 뭐냐’ ‘줄거리가 뭐냐’ ‘교훈이 뭐냐’ ‘어떤 느낌이냐’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아이들을 일찌감치 책과 담을 쌓게 만든다. 또 아이가 한글을 깨치면 부모가 더이상 책을 읽어주지 않거나 초등학교에 들어간 자녀에게 그림책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어른들의 편견이다.

아이에게 어떤 책을 읽혀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어린이도서연구회의 권장도서 목록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이 단체는 20년 넘게 어린이책에 대해 토론하고 유아부터 청소년까지 좋은 책을 뽑아온 ‘내공’이 깊은데다 외국동화, 국내 창작동화, 그림책 등의 분야로 나눠 권장도서 목록을 꼼꼼하게 선정하고 있다. 어린이도서연구회 홈페이지(childbook.org)에서 권장도서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같은 아이라도 관심사나 취향 등에 따라 좋아하는 책이 다르고 독서 능력에 차이가 있으므로 권장독서 목록을 ‘절대 지침’이 아니라 ‘참고사항’으로 활용하는 게 좋다.

글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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