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우리 시대 두 군인의 삶… 국군포로 전용일씨 귀환에 강철민 이병을 생각한다
여기 50살 차이가 나는 두 군인이 있다. 1931년생인 전용일 ‘일병’과 1981년생인 강철민 이병.
국군포로 전용일(72)씨는 크리스마스 전날인 12월24일 오후 인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입대해 육군 6사단에서 복무했다. 그는 1953년 7월 포로가 됐다. 올 6월 탈북해 중국으로 나온 전씨는 위조여권으로 한국에 들어오려다 중국공안에 붙잡혔다. 노무현 대통령은 50년5개월 만인 전씨의 귀환 사실을 보고받고 “귀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됐다”고 기뻐했다.
강철민(22) 이병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26일 오전 육군 31사단 보통군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강 이병은 휴가 뒤 부대 복귀를 거부하고 이라크 파병 반대 농성을 벌여 군무이탈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파병반대 병역거부자 강철민 지원단’ 홈페이지(http://peace.gg.gg)를 만들어 ‘강철민은 무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경거망동한 ‘또라이’나 군생활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한 ‘패배자’라고 비웃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국군포로와 ‘파병반대 병역거부자’ 문제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이란 거대한 뿌리를 만나게 된다. 전용일씨와 강철민 이병은 다같이 전쟁과 분단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희생자다. 한국전쟁과 이로 심화된 적대적 분단체제가 아니라면 두 사람의 경우와 같은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 국군포로 전용일
누가 칠순의 현역군인을 만들었나 “나는 50년간 한국을 위해 복무했다.” 전용일씨가 인천공항에서 밝힌 50년 만의 귀환 소감이다. 유사시 군인이 목숨을 바쳐 싸우게 하려면 국가가 자신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씨 문제와 관련해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에 대해 국가는 마땅히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말한 것도 포로와 실종자에 대한 정책이 군의 사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쪽은 곧잘 미국의 경우와 대비하곤 한다. 미국은 150년 전부터 유해발굴 부대를 창설해 미군 유해가 있는 곳은 세계 어디라도 찾아간다. ‘전우를 잊지 않겠다’가 미 육군 중앙신원감식소의 구호다. 미국은 1985년부터 북한 땅에 묻힌 미군 유해 송환 협상을 북한과 벌여 2001년까지 미군 유해 360구를 발굴해 송환했다.
미국은 미군 유해도 송환하는데, 한국은 왜 살아 있는 국군포로를 돌려받지 못하는 것일까. 국군포로에 대한 남북의 주장이 워낙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데다, 이 문제를 국제법적 판정과 해석을 통해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군포로를 전쟁 중에 공산군에 체포·억류된 국군이란 뜻으로 쓴다. 최근 국방부는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가운데 1186명의 생사 여부와 신원을 파악하고 있으며, 이 중 496명이 생존해 있다고 밝혔다.
반면 북한은 한국전쟁 기간 인민군에 의해 억류된 국군을 ‘해방전사’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한국전쟁 때 아무것도 모르고 남한의 군에서 종사하다 포로가 된 뒤 북한이 진짜 조국이었다는 깨닫고 귀순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북한은 자발적으로 남은 해방전사가 있을 뿐 “북한 내 국군포로는 단 한명도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국군포로들이 북한 여성과 결혼하고 가정을 이뤄 50년 넘게 살고 있으므로 북한 주민이라고 주장한다. 국군포로 존재를 부인하는 북한은 남한이 석방한 반공포로 2만7천명이야말로 억류포로라며 송환하라는 맞불 작전을 폈다.
섣부른 협상 종결의 가혹한 대가
국가간 전쟁의 경우 적대행위가 종료되면 쌍방이 포로를 송환함으로써 전쟁포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쪽 포로들에게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 거부와 잔류가 허용되었고, 양쪽은 전쟁포로의 실체와 그 수에 합의하지 않고 서둘러 포로교환 협상을 종결해버렸다.
2001년 4월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은 국회 답변을 통해 “민족상잔의 이데올로기 전쟁인 한국전쟁은 포로 문제가 국가 대 국가의 전쟁 때와는 달리 특수한 성격을 띠었다. 1953년 정전협정에 따라 11만8천명의 인민군 포로 중 70%에 해당하는 8만3천명이 북으로 송환됐고 30%에 해당하는 3만5천명(석방 반공포로 포함)이 한국에 남았다. 국군포로는 8300명이 귀환했고 1만9천명이 북한에 잔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들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확인되지 않은 채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고 밝혔다.
국군포로 문제가 현안이 된 것은 국군포로 조창호씨가 1994년 귀환하면서부터였다. 조씨는 귀환한 뒤 국군포로의 비극적인 북한 내 생활상을 고발했다.
원칙적으로 국군포로 문제는 정전협정 틀 안에서 재거론하고 해결하는 게 옳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정전협정에 규정된 전쟁포로송환위원회는 1953년에 임무를 완료하고 해산했기 때문에 이를 재가동해 미귀환 국군포로를 송환하는 절차를 밟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국군포로의 국제법적 해결이 어려운 상황에서 남은 방법은 남북 화해와 인도주의 방법이다.
정부는 국군포로 문제를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 범주에 포함해 ‘생사확인→서신교환→가족상봉→재결합(송환)’의 순서로 해결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본다. 남북은 2000년 12월 제2차 남북이산가족 방문단 때부터 방북한 남쪽 가족을 만나는 북쪽 이산가족들 가운데 국군포로 1~2명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제한적이지만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국군포로 가족들이 만나고 있다.
북한에 있는 496명은 어찌할 건가
보수 세력들은 ‘어떻게 국군포로가 이산가족이 될 수 있느냐’며 정부 방침에 불만을 표시하지만 대안은 내놓지 못한다.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 496명은 이미 70살이 넘은 고령이다. 식량난 등 북한의 어려운 형편을 감안하면 앞으로 10년 뒤면 국군포로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남북이 국군포로를 더 이상 이념대결의 수단으로 삼아 시간 낭비하지 말고 실현 가능한 것부터 점진적·단계적으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
김수암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 인권 실태와 개선을 위한 방안연구’ 논문에서 “정부 차원에서 이산가족, 납북자, 국군포로 등의 인권 사안에 대해 북한과의 공개 혹은 비밀 협상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군포로 문제는 상대가 있는 문제이므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남과 북이 자기 주장만 하면서 첨예한 입장 대립만 확인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파병반대 병역거부자 강철민
누구를 위한 병역 의무인가
2003년 12월26일 오전 10시 육군 제31사단 보통군사법원, 재판장과 군 판사들이 입정하자 헌병이 ‘일동 기립’을 외쳤다. 방청석 앞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주춤주춤 일어났지만 중간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왜 일어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냥 앉아 있었다. 헌병은 재판장에게 거수경례로 ‘재판 준비 끝’을 보고했다.
거수경례로 답한 재판장은 자리에 앉아 “피고인 강철민을 징역 2년에 처한다”는 판결문을 읽었다. 재판은 10여초 만에 끝났다. 헌병이 다시 ‘일동 기립’을 외쳤지만 방청객들은 일어서지 않았다. 몇명은 ‘파병이 유죄다, 강철민 무죄다’란 구호를 외쳤다. 강 이병은 친구들을 돌아보며 수줍게 웃었다. 헌병들은 재판이 끝났다며 웅성거리는 방청객들을 서둘러 부대 밖으로 내보냈다.
겨우 10초 만에 젊은이를 단죄한 법정
이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주장하는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더라도 특정한 정치 사안을 이유로 한 ‘선택적 병역거부 행위’는 양심의 자유 보호 영역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를 인정할 경우 자신의 견해에 따라 병역 의무를 각자가 결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강 이병이 이라크 파병이 철회되지 않는 한 절대 부대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병사가 부대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실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유죄 판결은 12월12일 첫 공판에서 이미 예견됐다. 이날 재판장과 군 판사들은 강 이병에게 “6·25 전쟁 때 미군 몇명이 전사했는지 사지선다형으로 물어볼 테니 답하라” “본인은 친구에 진 빚을 잘 갚은 편인가. 미국에 진 빚을 갚아야 하지 않느냐” “끝까지 자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등 유죄 예단(豫斷)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질문을 쏟아냈다(참고로 한국 전쟁 때 미군이 3만7천명 전사했다).
이에 대해 강 이병은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미국에 진 빚은 베트남전 때 다 갚았다고 생각한다” “헌법에 위배되는 침략전쟁에 참여하려는 국가가 부과하는 병역의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강 이병과 재판부의 법정 공방은 30분 동안 계속됐다. 변호인들은 “군사법정에서 군 검사도 아닌 재판장이 피고인을 취조하듯 질문해 놀랐다”고 말했다. 이날 군 검사는 강 이병에게 징역 3년형을 구형했다.
강 이병은 최후 진술에서 “어른들은 우리 세대가 전쟁을 잘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그 참혹한 전쟁을 지금 대물림하려 하는 것인가. 이라크 전쟁은 헌법을 부인하는 침략적 전쟁이다. 파병이 철회될 때까지 어떤 병역의무도 거부하겠다”고 말했다.
2003년 7월 입대한 강 이병은 11월17일 휴가를 나왔다. 이라크 파병반대 병역거부를 고민하던 강 이병은 친구, 변호사,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을 만나 도움말을 들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부대 복귀를 권유했다. 하지만 강 이병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11월21일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드리는 이등병의 편지’를 발표했다. 그는 11월28일 농성을 하던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나와 대통령을 만나러 청와대로 가다 헌병대에 연행됐다.
“파병 철회되면 내무반에 가련다”
‘강철민 지원단’ 홈페이지에는 ‘군생활이 하기 싫어 파병을 핑계대고 있다’ ‘군인정신이 빠졌다’는 비판이 흘러넘친다. 이에 대해 강 이병은 11월28일 연행 전 기자회견에서 “지금 제 진심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 가슴 아프다. 언제라도 파병이 철회된다면 모든 처벌을 다 받은 뒤 병역의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겠다”며 서글픈 심정을 밝혔다.
강 이병을 비판하는 쪽의 논거는 한-미 동맹의 중요성이다. 한국전쟁 때 미국한테 받은 도움을 갚아야 하고, 만약 다시 북한이 공격해올 때 미국의 군사적 도움을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라크에서 고생하는 미국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대미 보은론의 젖줄은 한국전쟁의 기억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강철민 이병은 휴가 뒤 부대로 돌아오지 않은 탈영병에 불과하다.
50년 전 미귀환 국군포로를 양산한 한국전쟁이 2003년 겨울 파병반대 병역거부자를 새로 낳고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전용일씨가 2003년12월2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왼쪽, 한겨레 김종수). 이라크 파병 반대를 주장하며 부대복귀를 거부한 강철민 이병(오른쪽, 한겨레 김태형).
누가 칠순의 현역군인을 만들었나 “나는 50년간 한국을 위해 복무했다.” 전용일씨가 인천공항에서 밝힌 50년 만의 귀환 소감이다. 유사시 군인이 목숨을 바쳐 싸우게 하려면 국가가 자신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씨 문제와 관련해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에 대해 국가는 마땅히 보호하고 지원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말한 것도 포로와 실종자에 대한 정책이 군의 사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50년 만에 돌아온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 전용일 일병. 전씨가 2003년 12월26일 국방회관에서 남쪽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지난 1999년 귀환환 손재술씨가 전역신고를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강 이병이 2003년 11월28일 청와대까지 행진하려다가 수방사 헌병대에 연행되고 있다.(한겨레 김종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