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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송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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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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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해가 가는구나.’ 세월이 빨라서가 아니라 인생이 유한하여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새색시가 김장 삼십번만 담그면 늙고 마는 인생, 우리가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면 시간의 흐름은 그다지 애석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모(歲暮)의 정은 늙어가는 사람이 더 느끼게 된다. 남은 햇수가 적어질수록 1년은 더 빠른 것이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송년>(送年)이란 수필 첫머리다. 해마다 한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이맘때면 생각나는 글귀인데 곱씹을수록 진한 여운을 남긴다. 덧없이 가는 세월이 한탄스러울 때면 더욱 그렇다.

돌이켜보면, 다른 해에 비해 2003년을 활기차게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참여의 시대를 열겠다는 노무현 정부 출범 때문이었다. 많은 국민들은 그가 제시한 비전처럼 ‘바로 서고’ ‘잘 살고’ ‘따뜻하고’ ‘당당한’ 대한민국으로 조금씩 바뀌어가는 모습을 무척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한해를 다 보낸 지금, 기대는 실망으로 많이 바뀌어 있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의 입은 가벼운 반면 국정개혁의 발걸음은 무겁고 더디기 때문이다. 이라크 관련 뉴스를 제외하면 ‘깜짝 놀랄’ 뉴스의 대부분은 그의 입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노 대통령이 입을 무겁게 하고 국정개혁을 발빠르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말까지도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고 우울하게 하는 일이 있어 착잡하다. 엄마가 세 자녀를 고층아파트에서 던지고 뛰어내리더니, 이번에는 아빠가 두 자녀를 한강에 던졌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중병에 걸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들이다. 478호 ‘만리재에서’에 “‘자살할 때 아이들은 남겨놓자’는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라고 쓴 적이 있었다. 한 독자께서 “너무 자극적인 표현을 써 적절치 않다”고 꾸짖는 글을 주셨는데, 지금도 후회스럽지는 않다. 160여명이 숨진 대연각 화재가 발생한 1971년 연말도 올해처럼 잔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쉬움과 착잡함이 겹치는 무거운 연말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오노스럽다’에 이어 ‘검사스럽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던 검찰이 정치자금 수사를 통해 ‘검사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 희망이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했던가. 격론 끝에 <한겨레21>의 ‘올해의 인물’에 뽑힐 정도로 ‘바로 서고 있다’고 평가받았으니, 이제 나라를 바로 세워주기를 기대해본다. 얼마 전 ‘큰스님’들이 잇따라 입적하면서 남긴 임종게도 송년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월하 스님은 “가고 머무는 것을 논하지 말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고, 청화 스님은 “이 세상 저 세상/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다”라는 가르침을 남기셨다. 피천득 선생의 단상과 달리 ‘인생은 유한한 것이 아니니 세모의 정을 애석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힌다. 덕분에 세월의 한탄스러움을 털고 희망찬 새해를 기다려본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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