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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내려다 보고 싶다, 진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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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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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즈 강조 사회’에 차별받는 키작은 남자들… 강박증 떨치고 자신만의 장점을 찾아라

(사진/운동처방은 자신감이 생겨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다니는 효과를 얻을 수 있으나 성장기가 지난 남성의 키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5cm의 비밀. 한 정보통신업체에 다니는 박정호(34·서울시 양천구 목동)씨는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며칠 전 회사 근처 병원에 가서 검사받을 때, 특히 키와 몸무게를 잴 때 뒷동료의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박씨의 키는 공식적으로는 167cm, 그러나 진짜 키는 162cm이다. 그는 남자 동료들이 모여 앉아 혹여 “여자들은 왜 몸무게를 줄여 말하지?” 하며 낄낄댈 때면 얼굴이 후끈거린다. 그러면서 맘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키 늘여 말하는 남자의 심정을 모르고서 몸무게 줄여 말하는 여자 이야기를 하지 말라!’

밤에만 근무섰다. 한 언론사에서 일하는 유아무개(29) 기자는 또래보다 키가 작지만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발랄해 성장기에는 큰 불편을 모르며 자라왔다. 그가 당한 최초의 불이익은 군대 시절이다. 경비중대에 속했던 그는 단지 키가 작다는 이유로 매번 밤마다 경비를 서야 했다. 낮에는 윗사람들이 드나드니 보기에 안좋다는 게 이유였다. 추운 겨울에 똑같이 키 작은 사수와 함께 경비를 섰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춥다’.

신발에 깔창 두개. 리서치 회사에서 일하는 김아무개(30) 과장은 얼마 전 여자 동료들에게서 캐주얼화를 하나 선물받았다. 야유회 때에도 끈달린 구두를 신고 나오는 그를 보다 못해 골라 준 선물이다. 가장 작은 사이즈의 성인화였는데 덜커덕거릴 정도로 컸다. 그래서 신발 모양 망가지지 말라고 넣어 놓은 종이뭉치와 마분지틀을 그대로 둔 채 신고 다닌다. 키가 163cm인 그는 발이 키에 비해 더 작은 편이다. 팔다리도 짧다. 왜 작은 사이즈 남성 기성복은 안 나오는지, 바지는 꼭 잘라야 하고 셔츠도 주로 접어 올려 입어야 하는지, 쇼핑은 괴로움 그 자체다.

누가 이 남자들의 고통을 알랴


(사진/만능엔터테이너 윤정수씨. 작은 키를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지만 최근 애인과 헤어진 원인을 자신의 키에서 찾는다)
여자친구가 떠났다. 서울방송 <호기심 천국>을 진행하는 연예인 윤정수(28)씨는 광고주들이 선호하는 만능엔터테이너이다. 키 작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산다. ‘연예생활’에도 불편함이 없다. 허나 ‘연애생활’에서는 눈물을 삼킨 적이 있다. 성격도 잘맞았던 여자친구가 결국 과거에 사귀던 키 큰 남자에게 떠나버린 것. 그는 자신이 키가 작기 때문에 여자친구가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동안 ‘사이즈’로 고통받았던 이들은 주로 여자들이었다. 여성의 상품화니, 상업주의니 논란도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서마저 비켜난 이들이 있다. 키 작은 남자들이다. 말랐다면 운동으로 키우면 되고 뚱뚱하면 살을 빼면 되지만 작은 키는 늘일 수가 없다. 게다가 비쩍 말라야 뚱뚱하지 않다고 여기듯 아주 커야 작지 않다고 할 정도로 세상의 잣대는 점점 살벌해지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키 작은 남자들은 위에서 본 사례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키 때문에 저마다 나름의 고통을 겪는다. 심리적 스트레스, 사회적 불이익, 생활의 불편, 이성관계의 곤란함 등을 꼽을 수 있다.

성장클리닉을 운영하는 한의원이나 병원, 맞춤운동처방센터 등에는 절박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종종 문을 두드린다. 미팅에서 놀림당한 뒤 키 작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밥상도 같이 안 하는 대학생부터 키 때문에 승진에 누락됐다는 강박증을 가진 40대 기업 간부까지 직업도 연령도 다양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이 키 클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한방처방이나 약물처방, 체형교정, 운동처방 등은 주로 성장판이 닫히긴 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무릎과 척추 등의 연골에 있는 성장판은 여자는 초경 뒤 2년 전후, 남자는 16살 전후면 닫힌다. 성인의 경우 체형교정은 자세를 반듯하게 하면 최대 2∼3cm는 커보인다는 데 기초한 것이고, 운동처방은 신체리듬이 좋아지면 스트레스가 적어지고 자신감이 생겨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다니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다이어트보다 눈물나는 키와의 전쟁

스포츠생리학을 응용한 서울의 한 맞춤운동처방센터 김양수(43) 원장은 “한번은 42살 된 남자가 두번이나 찾아와 ‘가능성이 있는지 테스트만이라도 하고 싶다’고 조른 일이 있다. 딱하지만 방법이 없어 돌려 보냈다. 20대 초반까지는 운동으로 미처 발육되지 못한 잠재성장을 도울 수 있지만 1년에 1cm 정도이고 25살이 넘어가면 불가능하다.” 비슷한 상황은 성장클리닉을 두고 있는 한의원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청소년을 상대로 한약처방을 하고 척추교정, 휜다리 교정 등 체형교정으로 키크기를 돕는 것을 성인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오해해서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뼈에 철심을 박아 매일 조금씩 나사를 돌려 뼈를 자라게 하는 일리자로프 수술을 멀쩡한 사람이 받는 경우도 있다. 사고 후유증이나 선천적 기형을 앓고 있는 이들을 상대로 한 이 외과수술은 최소 1년은 자리보전을 해야 하고 부작용과 후유증도 감내해야 한다.

살과의 전쟁 한쪽에는 이렇게 눈물나는 키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살빼기가 과도하듯 키크기 역시 별다른 효과없이 상업적인 목적에 휘둘리기 쉽다는 것. 시중에 나와 있는 각종 운동기구와 정체모를 약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서정한의원 박기원 박사는 “키에 대한 강박증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이 한의원을 찾는 20대 초중반 성인남성의 키는 170cm 이쪽저쪽. 우리나라 10∼20대 남자 평균키가 172cm, 30∼40대가 170cm인 것에 비춰보면 평균에 조금 못 미치거나 평균인 이들이다. 90년대 초반 통신판매로 등장해 온라인 인기상품으로 각광받는 키높이 구두를 찾는 이들 중에도 결코 작지 않은 이들이 많다. 가인패션몰 판매담당 박희태씨는 “심지어 275사이즈의 키높이 구두를 찾는 이들도 있다”고 귀띔한다. 이 정도 발이라면 키가 175cm는 족히 되는 이들이다. 팔방미인을 요구하는 사회가 과도한 키 콤플렉스를 부채질하는 것이다.

‘내대에 당한 설움을 자식한테 물려줄 수 없다’는 부모의 심정은 키에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성장클리닉을 찾는 부모들의 경우 아이의 건강이나 발육상태가 양호한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약을 지어주거나 키를 늘여달라”고 요구하는 이들이 많다. 경상대 의대 정형외과 송해룡 박사는 “청소년기에 호르몬처방 등으로 갑자기 키를 크게 해도 가능한 성장의 속도 차이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호르몬 처방이나 인공적인 수술을 시도할 만한 대상자는 대략 인구의 3%에 속하는 왜소증자로 남자의 경우 선천성인 140cm 이하나 가족성인 160cm 이하인 이들이다.

그렇다면 키 작은 남자들은 포기하고 살아야 하나. 회사원 박정호씨는 “내 경우는 키가 작아서 손해를 볼까봐 심리적으로 더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키 작은 남자도 불가능한 건 없다는 말은 사실 말짱 헛소리다”라고 심경을 털어놓는다. 경찰관이 꿈이었던 그는 진작에 그 꿈을 접었고(경찰공무원 채용기준은 키 167cm 이상이다), 잘 나가는 정보통신업체에서 일하면서도 미팅이나 중매가 들어올 때마다 번번이 망설였다고 한다. 한 결혼정보업체에 가입하려다 딱지를 맞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 최소한 키가 168cm 이상이어야 회원 가입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일도 있다.

키 작아서 좋은건…

(사진/키에 대한 강박관념이 문제다. 키높이 구두를 찾는 이들 중에는 결코 작지 않은 이들도 많다)
박씨는 “사이즈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극심한 인권탄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박씨는 이러한 ‘실존적 인권정신’이 빛을 발해 얼마 전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수영장에 다니면서 옆라인 수강생 중 혼자 뒤쳐져 연습하는 이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다 맺어진 인연이다. 세 번째 사례에 등장하는 리서치 회사 김 과장은 “키 작아서 좋은 건 야근할 때 소파에서 죽 발뻗고 자거나 의자에 기대서도 편히 잘 수 있다는 것, 여자 동료들이 살갑게 대해줄 때”라고 꼽는다.

경상대 송해룡 박사는 “내 키는 164cm이다. 몸의 키를 키우는 건 포기하고 마음의 키를 키우는 게 좋다. 나 역시 왜 진작에 그러지 못했을까 후회될 때도 있다”고 조언한다. 키는 외모에 중요한 요소지만, 키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도 중요한 해법이다. 연예인 윤정수씨는 나름의 옷맵시를 뽑낸다. 가능한 한 반바지를 고집하고, 양복을 입을 땐 몸에 꼭 끼게 하고 상하의를 같은 색으로 입는다. 긴 바지를 풍성하게 입으면 다른 사람과 절대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윤씨는 “일반인이 연예인처럼 매번 옷을 맞춰 입을 수는 없지만 조금만 멋내기에 신경을 쓰면 훨씬 행복해진다. 말하기 태도나 표정, 동작 등도 외양적인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친다”며 기죽지 말자고 당부한다.

김소희 기자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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