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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권력과 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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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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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난로와 같다.” 정치권에서 주로 쓰는 이 말은, 권력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에게 권력에 대한 집착을 경계시키고 신중한 처신을 강조할 때 자주 회자된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춥고, 너무 가까이 있으면 데거나 타버릴 수 있으니 추위에 떨지 않으면서 온기를 느낄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밀치고 교실 난로에 바짝 다가갔다가 교복을 태워먹어 어머니께 꾸중을 들어본 사람들은 더욱 실감이 날 것이다. 권력이 됐든, 난로가 됐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은 권력자에게도 역지사지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어 음미할수록 그 맛을 더한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미군에게 생포되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불법 대선자금 조성을 시인한 뒤 검찰에 출두함으로써 나라 안팎이 한꺼번에 시끌벅적하다. 활활 타던 난로가 꺼져가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난로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오랫동안 따뜻하게 해주어야 그 효용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후세인이란 난로는 이라크 국민들에게 고루 온기를 베풀지 못했고, 이회창이란 난로는 화력은 좋았으나 오래 타지는 못한 것 같다. 본인은 물론 그의 측근들도, 재벌들도 권력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모두 순식간에 타버리는 화를 자초했기 때문이다.

꺼져가는 난로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처지는 흡사해 보이지만 사뭇 다른 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억울하다는 측면에서는 후세인 전 대통령이 좀더 할 말이 많을 것 같고, 누가 더 ‘싸나이’다울까라는 점에서는 이 전 총재가 좀더 높은 점수를 받지 않을까 싶다.

후세인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철권통치를 위해 무차별적으로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했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국민들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미국의 주장에 대해 “그런 집권자가 지구상에 어디 나뿐이더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특히 그는 “설사 나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그건 이라크 국민들이 응징할 일이지, 미국이 도대체 뭐기에 주권국가인 이라크 내정에 간섭하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것이다.

땅속 움막에서 8개월 동안 숨어지내다 붙잡힌 후세인에 비하면, 감옥에 가겠다며 검찰조사를 자청한 이 전 총재의 모습은 그런 대로 늠름해 보인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옥인동 자택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보려는 용의주도함보다는 마지막 정치생명을 거는 그의 비장함에서,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게 된 것은 모처럼 찾아온 행운이다.

시골집 사랑방에 할머니가 지펴놓으신 화롯불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던, 그런 화롯불 같은 ‘권력’이 유난히 그리워지는 겨울밤이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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