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설사에 관한 대부분의 책 첫머리에는 어김없이 중세 스콜라철학의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등장한다. 교회가 거의 모든 학문적 판단의 권위를 갖고 있던 시대이니만큼 경제 문제 또한 종교적 판단의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현안 중의 하나는 돈벌이의 달콤한 유혹과 뜨거운 지옥불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번민하는 중생들에게 신뢰할 만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재화의 유무상통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이익을 얻기 위해 물건을 사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추방된다”라고 선언하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여러 가지 예외조항을 인정함으로써 현실과 타협하기에 이른다.
정치인의 존재 근거는?
예컨대 먹고살기 위해서나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경우, 그리고 물품을 단순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가공을 하거나 수송에 위험이 수반되는 경우 등이었다. 글쎄,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나의 불경스러운 상상이지만, 어차피 영혼의 양식은 생산할지언정 배를 채울 양식은 생산하지 못하는 교회로서야 사회의 다른 부문으로부터 부를 얻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경제적 거래를 죄악시해서는 스스로의 물질적 존립 기반을 허물어버리는 역설적 결과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타협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차피 불생산적 기생계급인 교회가 정의로운 교환과 정의롭지 못한 교환을 판가름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존립 근거를 확보하였던 셈이다.
어중간한 미니시리즈 뺨칠 정도의 흥미진진한 수법으로 가득 찬 대선자금 공개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지만, 정치인이야말로 전형적인 불생산적 기생계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니다. 참고로 ‘불생산적’이라거나 ‘기생’이라는 말에는 어떤 가치판단도 들어 있지 않으며, 그저 물질적인 부의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 어쨌든 작금의 사태는 철저한 통제하에 놓여 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과 달리 여러 가지 경로로 정보의 전달 속도가 빨라지면서 더욱 극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천문학적이라는 금액도, 아직도 다 회수되지 못한 5·6공화국 수뇌들의 수중에 잠겨 있던 ‘통치자금’의 규모가 몇천억원이라는 사실과 그간의 물가상승분까지 감안한다면야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 결과, 이미 인터넷 게시판의 수많은 댓글들에서, 그리고 신문 머리기사의 편집 방향에서 스스로의 바람과 현실을 혼동하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바늘 도둑’과 ‘소도둑’은 질적으로 다르다거나, 시쳇말로 누구는 조지면서 누구는 말랑말랑하게 다루느냐는 따위의 주장들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무릇 모든 기생계급은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입증함으로써 물질적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 정치인도 마찬가지인바, 그 중요한 역할은 크게 두 가지 정도라 생각된다. 하나는 나름대로 공익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이른바 정치 서비스의 제공을 통해 사회가 원만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이다. 다른 하나는 일정한 계급이나 그 분파의 이해를 대변하는 역할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국민 대중’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인에 대해 어떤 물질적 기반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사회 전체가 공익적 역할에 대해 지불하는 대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민 대중에게 떨어지는 비용 그렇지만 수백억원의 돈이 재벌기업으로부터 갹출되어 자본가의 대리인에 의해 전달될 때, 그것은 대자본의 분파적인 이익 유지를 위한 보험금의 외양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잠든 사이에 ‘국민 대중’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용인 셈이다. 때문에 이 시점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정치권의 공익적 존재증명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아울러 그 대가로서 제공되어야 할 물질적 기반의 한계에 대해 명확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대쪽’이나 ‘서민’이라는 뜬구름 같은 이미지의 붕괴를 애통해하거나 고소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1억원은 생계를 위한 자금이고 100억원은 지옥불에 떨어져 마땅할 자금이라고 판단하면서 우리에게 경제적 이익과 영적 구원을 동시에 챙겨줄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미니시리즈 뺨칠 정도의 흥미진진한 수법으로 가득 찬 대선자금 공개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지만, 정치인이야말로 전형적인 불생산적 기생계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니다. 참고로 ‘불생산적’이라거나 ‘기생’이라는 말에는 어떤 가치판단도 들어 있지 않으며, 그저 물질적인 부의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 어쨌든 작금의 사태는 철저한 통제하에 놓여 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과 달리 여러 가지 경로로 정보의 전달 속도가 빨라지면서 더욱 극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천문학적이라는 금액도, 아직도 다 회수되지 못한 5·6공화국 수뇌들의 수중에 잠겨 있던 ‘통치자금’의 규모가 몇천억원이라는 사실과 그간의 물가상승분까지 감안한다면야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 결과, 이미 인터넷 게시판의 수많은 댓글들에서, 그리고 신문 머리기사의 편집 방향에서 스스로의 바람과 현실을 혼동하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바늘 도둑’과 ‘소도둑’은 질적으로 다르다거나, 시쳇말로 누구는 조지면서 누구는 말랑말랑하게 다루느냐는 따위의 주장들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무릇 모든 기생계급은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입증함으로써 물질적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 정치인도 마찬가지인바, 그 중요한 역할은 크게 두 가지 정도라 생각된다. 하나는 나름대로 공익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이른바 정치 서비스의 제공을 통해 사회가 원만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이다. 다른 하나는 일정한 계급이나 그 분파의 이해를 대변하는 역할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국민 대중’이 직업으로서의 정치인에 대해 어떤 물질적 기반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사회 전체가 공익적 역할에 대해 지불하는 대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국민 대중에게 떨어지는 비용 그렇지만 수백억원의 돈이 재벌기업으로부터 갹출되어 자본가의 대리인에 의해 전달될 때, 그것은 대자본의 분파적인 이익 유지를 위한 보험금의 외양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잠든 사이에 ‘국민 대중’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용인 셈이다. 때문에 이 시점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정치권의 공익적 존재증명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아울러 그 대가로서 제공되어야 할 물질적 기반의 한계에 대해 명확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대쪽’이나 ‘서민’이라는 뜬구름 같은 이미지의 붕괴를 애통해하거나 고소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1억원은 생계를 위한 자금이고 100억원은 지옥불에 떨어져 마땅할 자금이라고 판단하면서 우리에게 경제적 이익과 영적 구원을 동시에 챙겨줄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 · 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