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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12 · 12의 주범들은 지금] 쿠데타, 이제는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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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11 00:00 수정 : 2008-11-2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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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변화와 군의 문민통제 자리잡아… 김영삼 정권 시절 군부 사조직 ‘하나회’ 뿌리 뽑다

2003년 겨울 대한민국은 우울하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각종 집회와 시위가 끊이지 않고 정치권은 지리한 밥그릇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다. 먹고살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이른바 남남 대결이란 이념 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사진/ 1998년 1월7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가 주례회동을 갖고 있다. 문민정부는 하나회를 숙정해 쿠테타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법적 · 제도적 장치 이중삼중

이렇게 세상이 어지럽지만 쿠데타를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 세상에서 쿠데타 가능성을 꺼내는 것은 생뚱맞다. 간혹 외신을 통해 알게 되는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쪽의 쿠데타 소식을 남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2003년 겨울 한국 사회의 쿠데타 발생 가능성은 과거완료형이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쿠데타 발생 가능성은 엄연히 현재진행형이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면 시사잡지에 ‘한국 군부의 동향’ ‘쿠데타는 가능한가’ 같은 기사가 단골로 실렸다. 사회가 불안해지면 군부의 정치 개입 가능성이 끊임없이 튀어나오곤 했다. 1990년 초반까지 야당이나 사회운동·학생운동권에서 해당 시기의 정세 분석을 할 때마다 군부 동향을 가장 먼저 눈여겨봤다. 1990년 이전까지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군부가 한국 정치에서 가장 영향을 미치는 집단으로 꼽히곤 했다.

10년 사이에 쿠데타는 왜 불가능해졌을까. 이런 질문을 한 30대 후반 영관급 장교에게 던져봤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다원화됐고 성숙했다. 군이 주도적 역할을 할 상황은 지났다. 만의 하나 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일시적으로 집권에 성공해도 정권 유지가 제대로 되겠는가. 과거처럼 공식 지휘계통까지 어긴 채 주도면밀하게 쿠데타를 기획하고 실행할 만한 군내 사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1979년 12월13일 아침 쿠데타군쪽의 노태우 9사단장 휘하 병력이 경복궁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다른 영관급 장교는 군인의 직업관 변화를 들었다. “민간 출신 대통령이 집권한 지 10년이 넘었고 군에 대한 문민통제 원칙은 대세로 자리잡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제 군인들은 안보 전문집단이란 자기 위치를 잘 알고 있다.”

쿠데타(coup d’Etat)는 ‘국가에 대한 일격’이라는 뜻의 프랑스 말이다. 민주군대는 정치적인 중립을 전제로 군 본연의 임무에만 전념하는 안보 전문가 집단이다. 민주군대와 쿠데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예전부터 국군 안에는 쿠데타를 막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이중삼중으로 쳐져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 가능성을 막기 위해 안전장치를 튼튼하게 마련해둔 것이다.

국군조직법에 따르면 평시 독립전투여단급 이상의 부대 이동 등 주요 군사사항은 국방부 장관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기무사령부의 핵심 임무가 대전복(對顚覆) 임무다. 쉽게 말해 쿠데타를 막는 것이다.

하나회,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정리했다

군 관계자는 “대전복 임무수행 개념은 전복 위협을 찾아서 제거하는 차원이 아니라 전복 징후를 포착해 사전에 이를 제거하거나, 전복 위협요소가 발생할 수 있는 여건을 찾아서 이를 관리함으로써 위협요소 형성 자체를 방지하는 것이다. 대전복 임무는 기무사 고유의 기능이자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고 설명했다. 기무사는 쿠데타 가능성을 막기 위해 주요 군 지휘관들의 공식·비공식 접촉 인물과 동향을 꼼꼼하게 챙긴다.

예방 조처에도 불구하고 쿠데타가 일어나면 수도방위사령부나 특수전사령부 등이 진압하는 대전복 임무 부대다. 이 때문에 역대 대통령은 기무사, 특전사, 수방사 등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런 쿠데타 예방·진압 시스템은 1979년 12·12 때도 있었지만 신군부의 군사반란을 막지 못했다. 쿠데타를 막아야 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쿠데타 ‘수괴’였고 대전복 부대 임무를 맡은 특전사와 수방사의 몇몇 지휘관들이 거꾸로 군사반란의 행동대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었다.

당시 전두환씨 등 신군부가 정상적인 지휘계통과 임무를 무시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란 사조직으로 탄탄하게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1993년 3월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하나회를 없애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뒤 1999년 8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하나회 정리는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했다고 밝히고, “이걸 안 했으면 문민정부도 없고 김대중 정부도 없었다. 쿠데타했을 게 뻔한데”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11일 만인 1993년 3월8일 육군참모 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고 하나회 숙정, 율곡 비리, 인사비리, 12·12 군사쿠데타 관련자 예편조치 등 마치 벼락이 내리치듯 하나회 관련 군인들을 정리했다. 이런 하나회 척결과정은 깜짝쇼란 빈정거림을 받았고 하나회 군인 중에도 ‘옥’과 ‘돌’이 섞여 있는데 무조건 ‘돌’ 취급을 하고 내다버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민정부 관계자들은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반박한다. 한 예비역 장성은 “1979년 겨울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보내려는 계획이 새나가면서 12·12가 일어났다. 이 점을 김영삼 대통령은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임 초기 군 장성 중에 김 대통령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민정부가 하나회와 타협해 동거하지 않는다면 집권 초기 숨돌릴 틈 없이 칼을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여름 정보기관·군·청와대 등에는 쿠데타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직으로 밀려난 일부 하나회 소속 장성들이 자금 마련과 병력 동원 등 역할을 나눠 쿠데타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회 쿠데타 모의설’이 퍼지자 정부는 쿠데타 주도 가능성이 있는 장성들과 그 주변 인물들의 전화를 감청하는 등 동향을 밀착 감시했고 쿠데타 자금줄을 캐기 위해 은행 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결국 소문에 그쳤지만 쿠데타설은 1993년 연말까지 유령처럼 서울 하늘을 떠돌았다.

초기 하나회 숙정은 사조직의 폐해를 절감했던 군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국민의 호응도 뜨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군 인사에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줄서기 같은 과거 사조직의 구태가 재현됐다는 비판이 일었다. 군 개혁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능력이라도 있던 ‘구악’이 물러간 자리에 무능할 뿐인 ‘신악’이 자리를 잡았다고 차갑게 웃었다.

국민의 정부가 남긴 문민 우위

문민정부의 군 개혁은 현철씨 비리와 국제통화기금(IMF)을 부른 경제 실정 때문에 빛을 잃고 말았지만 공과를 같이 보자는 주장도 있다. 피터 벡 미국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실장은 한 국내 신문의 기고문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경제위기 등과 연관돼 있지만 군부와 정보기구에 대한 문민의 우위를 확립했다. 하나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쿠데타 가능성은 거의 제로이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군부의 정치 개입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차단됐고 쿠데타는 과거완료형처럼 됐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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