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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재일(在日), 재한(在韓)/ 이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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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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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재일의 삶들을 요약해버리는 기호(記號)로서의 납치. 안의 억압과 밖으로 향한 폭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재일은 한국에 사는, 한국을 살고 있는 재한(在韓)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집을 비우는 날이 많은 나로서는 무엇을 키운다는 것이 늘 어렵게 여겨졌다. 2년간의 또 다른 객지 생활을 보내고 도쿄에 돌아온 올봄, 왠지 텅 빈 베란다가 마음이 쓰여 몇 가지 화분을 들여놓아 보았다. 우선은 어린 시절 얼굴을 씻고 난 물로 아침을 나누었던 채송화 화분 두개를 근처 꽃가게에서 600엔을 주고 샀다. 한여름 갖가지 색으로 피어오르는 작은 꽃송이를 보며 괜히 즐거워하던 어느 날, 나무인지 풀인지 모를 묘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식물을 만났다.

지금 일본은 많이 상해 있다

파피루스.


도쿄의 내 작은 베란다에 어릴 적 함께했던 ‘땅꽃’(땅하고 가장 가까이 꽃을 피워서 그런지, 제주 섬에서는 채송화를 땅꽃이라고 부른다)과 같이 먼 고대에 종이를 만들었다던 그 파피루스라니.

문득 낯익음과 낯섦이 교차하면서 중국 옌볜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코스모스를 보았을 때 설레던 기억과 함께 나일강을 떠나왔을 파피루스의 긴 여정에 나의 재일(在日)을 겹쳐본다.

섬에서 섬으로 간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집안의 친척들이나 동네 이웃분들은 물론이고, 섬에 살고 있는 주민 대부분이 마치 이웃 동네 드나들듯 오고 가던 일본. 재일을 살았던 사람들과 같이해온 제주 섬의 생활이 길었던 때문인지 재일이라는 이름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일본에서’ 사는 것과 동시에, ‘일본을’ 사는 존재로도 의미 되는 재일이 된 지도 벌써 열여섯번이나 해가 바뀌었다. 정확하게는 지난해, 지지난해 두해는 다른 먼 섬나라 영국에 있었으니 열네해를 산 셈이다.

정착 정도에 의해 붙여지고, 불리는 이름과 정치적·사회적 관계.

난민, 이민, 외국인 노동자, 이주 노동자, 불법 체류자, 탈북자, 디아스포라, 망명자 등의 서로 다른 이름들. 떠나며 돌아오고 다시 떠나는 이동의 모습들.

이 많은 삶의 조건인 이동들 안에서 한반도 인의 재일(在日)은 무엇일까.

몇 가지로 중첩되는 재일의 형태들. 재일 안에 여러 재일들, 그와 함께 정치적·사회적으로 재일이 다시 떠오를 때, 재일이 다시 드러날 때, 그것은 어떤 때인가

‘자살자가 3만명을 넘어섰다. 7월 말 경찰청이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자살자는 3만2143명, 매일 9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스스로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자살자가 3만명이 넘는다는 것은 자살미수자가 그 10배인 30만명이 넘음을 의미한다. 또한 한명이 자살하면 가까운 주변의 다섯명에게 강한 정신적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자살은 연간 150만명 전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큰 사건이다.’ 2003년 8월에 보도된 일본 <아사히신문>의 내용이다.

동시에 재일 조선인 어린이들에게 향하는 물리적·언어적 폭력들.

가해의 기억이 빚어내는 내적 폭력의 만연과 자신을 달래고 추스르는 언어의 부재. 지금 이곳 일본은 많이 상해 있는 것 같다.

재일을 들춰내는 국가적 장치

북한의 일본인 가족 납치사건 인정 이후에 드러나는 여러 가지 억압 장치들. 정치·경제·사회적 분석과 함께 비판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납치 가족들을 둘러싼 철저한 언론 통제와 사회적 언술의 균일화가 서민들의 일상에 퍼져가고 있다. 수많은 재일의 삶들을 요약시켜버리는 기호(記號)로서의 납치, 그리고 북한이라는 용어의 범람. 안의 억압과 밖으로 향한 폭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재일은 한국에 사는, 한국을 살고 있는 재한(在韓)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재일을 새삼 들춰내는 국가적 장치들은 어떤 것인가? 무엇이 재일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한 사람 한 사람 재일이 갖고 있는 갈등, 망설임, 구체적 일상들이 삭제되고, 반면에 기호로서 9·11, 테러, 북한, 납치와 함께 공격성을 띠기 시작하는 소리 없는 질문들.

“당신은 어느 쪽 재일인가, 혹은 어떤 재일인가?”

재일의 아픈 역사와 함께 다시금 재일이 흔들리면서 생채기가 나려 한다.

이정화 | 일본 세이케이대학 교수 · 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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