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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국 워싱턴의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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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2-04 00:00 수정 : 2008-11-2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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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없이 평화 새겼다

일반적으로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그 흔적을 보존하는 장소는 건축물로 기념비화하고, 그 안에 무언가 많은 이야기를 담아야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상징적이어야 하거나 기념비적인 웅장함을 갖추지 않더라도 충분히 기념하고 기억하는 장소로 사랑받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사진/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은 벽이 전부다. 깨알같은 글씨로 희생자 이름을 새긴 벽이 땅의 고저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워싱턴에 있는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은 이런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워싱턴 몰, 링컨기념관에서부터 국회의사당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관공서, 박물관 등의 공공시설과 공원으로 조성된 곳을 통칭하여 워싱턴 몰로 부른다.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은 워싱턴 몰에서도 아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는 셈이다.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하는 전시회에 종종 ‘벽’(The Wall)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하는 이 메모리얼은 마야 린이라는 중국계 유학생이 제안한 설계작품이 1982년 공모를 통해 당선되어 지어졌다.

이 메모리얼은 우리가 흔히 보는 기념관, 추모관 같은 건물이 아니다. 벽이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이 메모리얼은 공원에 설치된 벽이 전부다. 물줄기를 따라 넓게 조성된 공원 한쪽에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해 완만한 각으로 V자를 그리며 검은 오석으로 벽을 두른 이 메모리얼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시작과 끝 부분이 길에 닿아 있고 점점 높아져 중심이 건물 한층 정도의 높이를 이루는 이 메모리얼에는 늘 참배 행렬이 이어지며, 탁본을 뜨듯 벽에 종이를 대고 희생자의 이름을 옮겨 새기는 광경이 여기저기서 목격된다.

이 메모리얼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기존의 주변 환경을 가능한 한 훼손하지 않고 사람이나 자연에 친화적으로 꾸밈으로써 기념이며 추모의 정신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메모리얼은 지리산 역사박물관이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데 일말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주연/ 건축디자인 전문 월간 <공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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