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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판 재판, 우리나라는 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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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26 00:00 수정 : 2008-11-2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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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수면위 떠오른 재심제도…“거의 19세기 수준으로 보수적”평가 높아

‘좁은 문’인가, ‘닫힌 문’인가, ‘열리지 않는 문’인가.

‘재심에 이르는 문턱’이 무척 높은 한국 사법체계를 두고 법조계 안팎에서 흘러나오는 우스갯소리다. 재심제도를 보수적으로 운용해온 대법원에 대한 비아냥도 섞여 있는 이 우스갯소리가 최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법원의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앞두고 다시 한번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 재심제도를 보수적으로 운용해온 대법원. 재심이 이루어지려면 법률이 정한 엄격한 조건에 해당해야 한다.(김진수 기자)

‘활발한 재심’이 필요한 대한민국

“위헌적인 긴급조치에 의해 영장도 없이 체포됐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1년이 넘도록 가족과의 면회가 금지됐다. 수사관들이 각본에 따라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에 서명·날인해야 했고, 원하는 대로 허위자백을 할 때까지 고문당했다. 법정에서 공소사실이 사실과 다르며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나, 비상보통군법회의는 피의자 신문조서와 몇 가지 압수물을 근거로 사형, 무기징역, 징역 20년 등 중형을 선고했다. 변호인들이 신청한 증거는 채택되지 않았고, 변호인 심문도 없었다. 공판조서는 피고인들이 모든 범죄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피고인들이 고문당한 사실이 없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사받았다고 답변한 것으로 변조됐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에게 최후진술의 기회도 주지 않고 판결을 선고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피고인들이 겪은 일을 요약해본 것이다. 이 정도 사건이라면 고문 사실이나 공판조서의 변조 사실을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법원이 재심을 열어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문명국가의 도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사법체계에서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재심제도에 대한 보수성은, 이처럼 명백해 보이는 사건도 재심이 이뤄질 수 있을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계기를 통해 문제점을 확인하고 재심제도와 관련한 법적·제도적 개선책 마련에 돌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과거가 복잡하고 과거청산의 과제가 많은 사회’에서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국가기관들이 앞장서 진행한, 국가폭력의 성격을 띤 형사피해사건의 경우 과거청산의 제도적 틀로서 재심제도가 더욱 원활하게 기능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의 재판을 다시 열어 실체적 진실을 재확인하는 ‘재심제도’를 대하는 사법부의 분위기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부정적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피고인에 대해 무죄가 인정된다면 법원으로서는 무척 난감한 일이기는 하다. 재판의 권위가 한순간에 땅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법원은 ‘법적 안정성’과 ‘재판제도의 안정성’을 근거로 들며 재심제도를 극히 제한적으로 운용해왔다. 재심절차를 규정한 법률(형사소송법)의 개정이 논의되지 않은 배경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재심을 시작하려면 법률이 정한 엄격한 조건에 해당해야 한다. 조건을 명시해놓은 법률은 두 가지. 하나는 형사소송법이고,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법이다(표 참조). 두 가지 법률 이외에 재심청구가 가능한 경우로는 특별법이 있다. 특별법을 통해 재심청구가 가능하도록 한 경우로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대표적이다. 이 법에 따라 관련 사건들이 재심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무죄 선고가 잇따르고 있지만, 독재정권의 폭압통치에 직·간접적 영향을 받은 무수한 ‘과거청산’ 관련 다른 사건들은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진/ 최후진술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사형집행 당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하재완, 김용원, 송상진, 여정남, 이수병, 서도원, 도예종, 우홍선.

법체계 · 법조문 일본 판박았다

현재 우리 재심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핵심적 재심 이유인 증거의 ‘신규성’(얼마나 새로운 증거인가)과 ‘명백성’(얼마나 명백한 증거인가·관련조항은 형사소송법 420조 5호)에 관한 엄격하고 보수적인 대법원의 법해석에서 비롯한다. 보통 재심청구는 새로운 증거가 생겼을 때 이뤄지기 때문에 새롭게 발견된 증거가 재심을 청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여부는 재심제도의 운용에서 핵심 논점이다. 그런데 대법원의 기존 판례는 새롭게 드러난 증거가 기존 재판에서 제출된 증거들을 완전히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즉, 대법원은 이와 관련해 △명백한 새로운 증거라 함은 다른 증거에 비해 객관적 우위성이 인정될 만한 근거 있는 증거 △모든 증거 중에서도 어떤 특정 증거가 특별히 신빙성이 객관적으로 두드러지게 뛰어날 정도로 있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판단해왔다.

이에 대해 김형태 변호사는 “이같은 대법원의 태도는 ‘19세기에나 있을 법한 권위주의적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과거에는 ‘확정판결이 곧 진실’이라는 발상 아래 진범이 나중에 잡힌 경우 등에 한해 극히 예외적으로 재심을 인정해왔더라도, 최근 세계적으로 재심을 인권보장의 유력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추세를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후진적 모습이라는 얘기다. 김 변호사는 또 “최근의 세계적 추세는 결국 재심판결에서 무죄로 될지 모르는 청구를 빠짐없이 구제하기 위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소송법의 기본 철학을 재심청구 심리단계에서도 적용해 무죄의 합리적 의심이 있으면 재심을 개시하도록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고 덧붙였다.

우리의 재심제도는 사실 법체계와 법조문까지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복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이미 70년대에 “증거의 명백성이란 확정판결의 사실 인정에 관해 합리적 의심을 품게 하고 그 인정을 뒤집기에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명백한 증거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만일 그 증거가 확정판결을 내린 법원의 심리 중에 제출되었다면 과연 그 확정판결과 같은 사실 인정에 도달했겠느냐의 관점에서, 그 증거와 다른 증거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판단해야 한다”(이른바 ‘백조사건’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고 해석했고, 이같은 원칙은 재심제도 운용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이런 일본 판례를 연구·인용해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이 지난 95년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던 ‘재일동포 신귀영씨 가족 간첩단 사건’은 우리 대법원의 보수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경우로 꼽힌다. 대법원은 당시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이 내린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해 기존 판례와 어긋난다면서 파기 환송함으로써 재심제도의 진전을 스스로 제한하고 말았다.

한편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해 관심을 끄는 또 다른 대목은, 과연 법원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재심 개시 결정에 얼마나 반영할 것이냐는 점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변호인들이 이 사건의 재심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이유는 “수사과정에서 고문 등 불법이 존재한 사실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행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르면 이 점이 인정되려면 불법수사 과정이 법원의 확정판결로 확인돼야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당사자들을 처벌하고 싶어도 공소시효가 이미 끝나는 바람에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는 실정이다.

사진/ 지난 1999년 자수한 ‘고문기술자’ 이근안씨.

이근안 고문사건 어떻게 처리될까

다만,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는 때는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조항(형사소송법 422조)을 적용해야 하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 의문사위원회의 조사결과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는 게 변호인들의 주장이다. 변호인들은 의문사위원회가 특별법에 따라 대통령 소속하에 설치된 국가기관이며 동행명령제도나 공소시효 정지제도를 도입하는 등 준사법적 성격이 명확한 만큼, 이곳의 조사결과는 재심 개시 여부 결정에 핵심적 판단자료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또 앞으로 ‘고문수사 등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는, 많은 과거청산 관련 사건들에서 의문사위원회의 조사내용이 재심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진/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져 재심이 이뤄질 예정인 이근안씨의 고문피해자 함주명씨 사건의 처리결과도 관심거리다.
이와 관련해 최근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져 재심이 이뤄질 예정인 함주명(72)씨 사건의 처리결과도 관심거리다. 함씨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의 고문피해자다. 그는 지난 2000년 9월 “고문수사로 인한 허위자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고, 3년이 지난 뒤에야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당시 변호사) 등 민변 소속 변호사 13명은 이씨가 자수한 직후인 99년 11월 ‘불법감금독직폭행죄와 허위증언에 의한 위증죄’로 이씨를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이씨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당시 이씨에 대한 수사기록과 불기소 결정문 등에서 이씨가 함씨를 고문한 사실을 적시한 바 있다.

이 사건 역시 고문 등 불법수사를 자행한 이씨에 대한 확정판결이 없다는 점에서 재심제도 운용과 관련한 법원의 태도를 가늠할 수 있는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수사과정을 통해 밝혀낸 이씨의 고문 사실이 확정판결을 대신할 만한 증거로 채택될지 여부가 주목되는 것이다. 이 사건의 변호인인 조용환 변호사는 “함씨 사건의 경우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재심 이유뿐 아니라 헌법재판소법에 의한 법률적 재심 사유가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어 법원이 이를 어떻게 판단할지도 주목된다. 조 변호사는 법원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함씨에게 적용된 형벌 법규 자체가 위헌 결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함씨의 유죄 판결을 가능하게 했던 법해석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을 선언했기 때문에 헌법정신에 따른 민주적인 법적 안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재심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조 변호사의 견해가 받아들여질 경우 비슷한 유형의 조작간첩 사건들의 재심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재심청구 중 무죄판결 가파른 증가

한편 대법원이 밝힌 최근 5년 동안의 재심사건 접수현황(표 참조)을 보면 1999년 이후 재심을 청구하는 사건은 가파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무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의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결과는 한해 무죄를 받는 피고인의 수가 한두명이었던 80년대보다는 진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이 재심제도를 마련한 목적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재심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이번 기회에 법 개정까지도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법 개정의 방향과 관련해 법조계 일부에서는 △재심제도를 국가나 재판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아닌 무고를 구제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상의 제도로 파악한다는, 재심의 기본이념을 법조항에 포함시키는 방안 △재심 이유를 세계적 추세에 맞춰 완화하는 대신 재심청구 남용을 막기 위해 법무부 장관이나 특정한 위원회에 재심청구권을 주는 방안 △재심청구를 원판결 법원에 하는 현재의 제도를 바꿔 독립적 상급법원이 통일적인 관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안 △까다로운 재심 개시 절차를 완화하는 방안 등이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판은 범죄 사실보다 더 범죄적이다.” 16세기 사람인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재심의 문턱을 합리적으로 낮춤으로써 이 제도를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로 인정해주는 것은, 어쩌면 문명사회의 또 다른 지표인지 모른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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