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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고구려와 조선족/ 이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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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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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이 서로를 한 민족, 한 핏줄이라고 여겼을까. 영화 <황산벌>을 보면 그런 의문이 저절로 든다. 신라와 백제의 싸움을 사투리의 싸움으로 치환해놓은 상상력이 기발하다. 신라와 백제 사이는 형제국이 아니라, ‘거시기’가 암호로 취급되듯이 말이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이다. 그러기에 계백은 처자식까지 죽이고 신라와 싸우러 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고구려 · 백제 · 신라 사이에 핏줄의식, 민족의식을 부여해 같은 민족으로 부르고 형제국으로 만든 것은 훗날 조선인들, 한국인들이다.

한-중 국가주의의 충돌

하지만 <황산벌>에서는 초반의 ‘사투리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 사상’으로 끝나고 만다. 영화 말미에서 백제와 신라의 대립은 신라와 당나라의 대립으로 바뀌고, 김유신은 사대주의자 김춘추와 대비돼 민족주의자로 그려진다. 김유신은 계백의 죽음을 측은하게 여기면서 당나라를 기어이 몰아내겠다고 다짐한다. <황산벌>은 김유신의 민족주의적 측면을 부각해 신라가 이룬 통일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뿌리 깊은 불만, 상처난 자존심을 위로해주는 셈이다.

한국인들 가운데 신라의 통일을 마땅찮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 김유신·김춘추가 이끈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불완전한 통일을 하는 바람에 옛 고구려의 땅, 드넓은 만주 대륙을 잃어버렸고, 우리 민족의 기반이 축소되었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과 비례해 잃어버린 만주땅에 대한 아쉬움과 고구려를 향한 그리움, 고구려의 신화는 강해진다.

그런데 그런 고구려를,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자 꿈에도 못 잊을 고구려를 중국이 가져가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 하고 있어 우리 국민들을 자극하고 있다. 중국의 중화주의 책략을 비난하는 가운데 한-중 사이에 고대사를 둘러싼 역사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다.


중국은 지금의 국경선 안에 있는 역사를 모두 중국의 ‘국사’로 취급한다. 56개 민족을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통합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지금의 국경선이 아니라 혈통상의 우리 민족이 거주한 곳의 역사를 ‘국사’로 다룬다. 한민족의 자존심을 강조하고 민족주의적 의식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한-중 양국의 ‘국사’ 기술 범주에서 보면 우리가 만주라 부르는 고구려와 발해의 근거지는 두 나라 모두 역사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공동의 역사 대상이 된다.

한-중 사이에 역사 충돌이 불가피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자국 중심주의 역사 쓰기는 일본 패권주의자들이나 중국 중화주의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 특히 고대사가 근대 국민국가의 국민 만들기, 민족 만들기의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고대사에 대한 국민 공동의 기억을 바탕으로 동일한 하나의 국민의식, 민족의식을 만드는 일은 거의 모든 국민국가들에게 보편적인 일이다. 한국과 중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고대사를 현재의 정치적·국가적 요구를 위한 이야기, 국민과 민족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왔다. 양국 정부가 국정 교과서 ‘국사’ 체제를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만주 지역의 역사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충돌은 역사의 충돌을 넘어 국가주의의 충돌이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국가주의 역사관이 강화되는 것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중국과 우리의 국가주의 역사 서술, 궁극적으로는 국가주의 자체를 냉정하게 점검하는 일이다. 발해와 고구려의 민족 구성이 그러했듯이 만주 지역은 한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혼성의 공간이다. 만주는 중국의 공간이자 한국의 공간이기에 두 나라 역사에 모두 포함되며,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유할 수 없다. 그 혼성의 공간으로서의 만주는 동북아 상호 교류와 교섭의 공간이었다.

성찰적 동아시아 감각

과거의 역사가 그러하다. 따라서 만주라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제3의 공간을 고리로 삼아 국가와 민족을 넘어 동아시아적 감각을 훈련하는 장소로, 성찰적 동아시아 감각을 키우는 장소로 활용하는 지혜를 모으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빛나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가난하고 초라한 조선족 동포들은 우리 밖으로 밀어내는, 만주에 대한 우리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국가주의·민족주의는 결코 정답이 아닐 뿐더러 새로운 시대의 트랜스 내셔널(trans-national) 조류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연변을 비롯한 만주의 역사적인 역할을 되살리는 일, 그리하여 동아시아 공동의 집을 위한 토대로 삼는 일이 절박하다.

이욱연 | 서강대 교수 · 중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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