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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말실수와 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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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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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풀린 사회일까요, 고삐 풀린 사회일까요. 고위공직자나 정치인들의 말실수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높으신 분들의 실언이 예전에도 없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유난히 빈도가 잦아졌다는 느낌입니다. 그 중에는 말짱한 정신에서 한 실언도 있지만, 폭탄주와 연계된 ‘취중실언’도 많습니다. 말이라는 것도 일수불퇴인데 정말 딱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말실수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내면 세계의 일단을 드러내는 진담이라는 게 적절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또는 자기과시를 위해 여과되지 않은 말이 그대로 나왔을 뿐, 사실은 평소 갖고 있는 속마음과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의 실언 중에는 서석재 전 총무처 장관의 ‘전직 대통령 3천억원대 비자금 보유설’처럼 ‘정보력 과시형’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식의 구제불능성’이라는 점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공로담’이나, 대검 차장 출신의 이원성 민주당 의원의 ‘검찰을 동원한 정치개혁 추진 검토’ 발언은 모두 ‘수단·목적 혼동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기배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제주는 반란의 땅” 발언은 평소의 역사의식 수준이나 이념적 방향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회의식과 지표는 훨씬 앞서가는데 이른바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의식은 아직도 후진형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의 잇단 실언 중에서도 역시 압권은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의 발언입니다. “올브라이트 장관 가슴 탱탱”, “구로공단 여공들의 짧은 스커트 속의 팬티” 운운 등의 발언은 물의를 빚기에 기막히게 완벽한 요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성비하형 발언이라는 점에서는 김시평 전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장의 발언(“아키코상은 미인”, “안경쓴 여자는 매력이 떨어진다”)의 맥을 잇는 것이지만, 거기에 한술 더떠서 계급차별적 인식도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발언이 외교문제로 비화할 가능성까지 있다는 면에서는 가히 ‘실언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그의 실언(정확히 말하면 망언)이야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를 화두로 여러 가지 생각할 점도 없지 않은 듯합니다. 이 장관의 발언이 나온 배경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주소와 각자의 속마음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기회라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그의 발언은, 공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질수록, 그리고 ‘찐한 농담’을 주고받을수록 친밀도가 높아지는 우리 남성사회의 정서를 다시 한번 입증해 보입니다. 구로공단 여공 발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장관의 발언에 손가락질을 할 만큼 노동자 계층에 대한 경멸의식에서 자유로운가도 한번 생각해볼 대목입니다. 오로지 돈을 향해 질주하는 사회에서, 진정 마음속 깊이 노동의 소중함을 새기면서 저소득 노동계층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공직자의 말실수를 욕하기는 쉽지만 우리 내면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크게 바뀔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만, ‘절대로 말조심하고 속생각을 절대로 드러내지 말자’는 자기단속을 강화하는 계기는 되겠지요.


한겨레21 편집장 김종구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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