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언론학자와 언론 관련 단체들은 신문·방송들이 ‘범죄(부패)와의 전쟁’ ‘취업전쟁’ ‘입시전쟁’ 등과 같이 ‘전쟁’이란 표현을 너무 남발해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며 시정을 요구한 적이 있다. 이 지적은 언론계로부터 큰 공감을 얻어 자성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각종 매체에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는 ‘전쟁’이 아닐까 싶다. 이라크 전쟁이 예고되면서 2003년이 시작된데다 전투병 추가파병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탓이다. 불법 정치자금 조성, 청년실업, 학벌사회 등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방한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파병 반대파에게는 ‘저승사자’로, 파병 찬성파에게는 ‘구원투수’로 불리는 그의 방한으로 대략적인 파병 그림이 완성됐을 법한데도 한-미 두 나라는 ‘추가 협의’란 표현으로 비켜갔다. 그는 추가파병 결정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파병은 파견국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모호한 말을 토해내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파병 문제와 함께 주한미군 재배치와 용산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들먹인 탓에 그의 얘기는 가증스럽게 들리기도 하지만, 추가파병이 거부할 수 없는 현실임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상당수 전투병이 포함된 추가파병이 내년 2월께 이뤄질 테니, 다가오는 연말연시는 1년 전처럼 또다시 ‘전쟁’ 뉴스에 파묻혀 지내야 할 것 같다. 한국이 ‘진정한’ 참전국이 되는 올 겨울은 아무리 옷깃을 여며도 살을 에는 추위를 느끼게 될 것이다.
노동계와 정부도 때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 친노동계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이 집권했는데도 우리 노동계는 겨울의 문턱에서 거리를 헤매고 있다. 민주노총은 파업에 강경대처하는 정부를 불신해 마침내 총파업을 선택했다. 정부는 ‘우군’이라고 믿었던 민주노총이 강경일변도의 투쟁노선으로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등을 돌렸다. 참여정부 초기 대화와 타협을 통해 노동계와 정부가 산업현장에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들은 의아하고 불안할 뿐이다. 어쩌면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진짜 이유는 이라크 추가파병도, 북핵 문제도, 여야 정쟁도 아닐지 모른다. 불안은 정부와 노동계가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상생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고 있다. 둘의 불편한 관계를 즐기며 손배·가압류라는 실리를 챙기는 사용자쪽도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노사정이 의기투합해 노동현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 소비와 내수를 진작시킨다면 그런대로 우리 사회도 조금은 사는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동맹관계’에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고, ‘동지관계’를 거부하며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이 새로 그려지기를 기대해본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