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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색의 장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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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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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술이편에 ‘學而不思 則罔, 思而不學 則殆’라는 구절이 있다. “배우기만 하고 사색하지 않으면 도리를 몰라 어둡게 되고, 반대로 사색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선적이어서 위태롭게 된다”는 말이다. 학문이란 배우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사색을 많이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본격적인 대학입시철이 시작됐다. 우리의 자녀, 동생, 조카들이 대입 수능시험을 치름으로써 새내기 대학생이 되려는 첫 관문을 두드린 것이다. 수능시험을 마친 입시생들은 내년 초 이뤄지는 대학별 논술이나 구술면접에 대비해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꼭 입시를 겨냥하지 않더라도 그동안 지긋지긋했던 암기 위주의 교과 공부에서 해방돼 교실 밖 세상을 호흡하며 사색에 잠겨보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암담하고 삭막하고 뒤틀린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이제 곧 대학생이 될 그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가장 심각한 사회현상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청년실업’이란 답변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다. 멀지 않아 닥칠 자신들의 문제인데다, 지금처럼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이 되지 않는다면 진학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때문에 청년실업은 두려움이고 악몽이다.

이번호에서 표지이야기로 다룬 ‘40, 50대의 조기퇴직’ 문제도 꽤 많은 관심을 표시할 것 같다. 자신들의 아버지가 겪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멋진 대학생활을 위해 용돈을 넉넉히 타 쓰면 좋겠지만 당장 학비부터 걱정을 해야 할 형편이니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조기퇴직한 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하늘의 별 따기라는 ‘알바’ 자리를 구해야 할테니 나오느니 절로 한숨일 것이다.

그런 일이 또 벌어져서는 안 되겠지만, 남학생들은 ‘해외 파병’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두는 게 좋을 듯 싶다. 미국이 언제 또 어느 나라에서 전쟁을 일으켜 ‘만만한 나라’ 한국에 파병과 전쟁비용 부담을 요구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파병 대열에 군에 간 남자친구가 포함될 수 있으니 여학생들에게도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은 그들에게 먼 얘기일 수도 있지만 정치권과 검찰이 신경전을 벌이는 ‘불법 정치자금’ 문제와, 정부와 투기꾼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부동산 투기’ 문제도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이번만큼은 불법·부조리의 발본색원과 완벽한 제도개선을 이뤄 제발 어른들의 문제로 끝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이런 추악한 일들이 그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말이다.

사회에 첫발을 딛는 새내기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마음껏 사색에 잠기는 그런 세상은 언제쯤 열릴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몫이다. 사색하지 않는 어른들도 도리를 모르고 독선적이기는 마찬가지여서 세상을 위태롭게 할 뿐 결코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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