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사과는 저승서 들으려나
등록 : 2000-11-07 00:00 수정 :
11월3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명금(84) 할머니가 숨졌다. 사망원인은 심근경색, 뇌졸중에 폐렴 합병증. 열아홉에 중국 손오현으로 끌려가 여든셋에 돌아오기까지, 얻은 병이었다. 99년 영구 귀국한 지 꼭 한해만이었다.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64년간의 타향살이였다. 서러울 때마다 혼자 들판에 나가 목놓아 부르던 노래 <타향살이>. 고향에 돌아와서도 그 아픈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가끔 혼자서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상념에 젖곤 하던 문명금 할머니. 처음엔 말 수가 적었지만 이내 ‘만남의 집’ 생활에 적응했다. 올 6월엔 위안부 피해자로 받은 정부지원금 4300만원 전액을 ‘베트남 민간학살 진실 위원회’에 기부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사죄의 평화역사 기념관 역사박물관 건립에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베트남 양민학살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만남의 집 장왕규 총무는 “할머니는 그 일로 늘 흐뭇해하셨다”고 전했다.
“난 추운 나라에서 살다 와서 괜찮아. 갈 수 있어.”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수요집회에는 빠지지 않았다. 매서운 찬바람이 몰아치고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마찬가지였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괘념치 않았다. 한번은 감기에 걸린 문명금 할머니를 걱정한 사람들이 할머니 몰래 차를 몰아 일본대사관 앞으로 출발했다. 이 사실을 안 할머니는 “난 그래도 가야 한다”며 울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 할머니들의 손을 꼭 잡으며 “죽어도 데모하다가 죽다”고 다짐했다.
천명을 알아서였을까. 지난 한가위, 할머니는 고향 여수에 다녀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부모님 산소에 다녀 온 다음날, 할머니는 몸져누웠다. 호흡이 곤란하고 가래가 심하게 끓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결국 11월3일 밤 11시30분, 서울 중앙병원 중환자실에서 눈을 감으셨다. 장 총무는 “편안한 얼굴로 웃음까지 머금고 계셨다”고 전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꼭 잡아주었다는 넉넉한 할머니는 그렇게 떠났다.
11월5일 나눔의 집에서는 흐느낌 속에 노제가 벌어졌다. 추모시가 헌정됐고, 추모사가 이어졌다. 강덕경 할머니, 조순덕 할머니, 김옥주 할머니. 나눔의 집에 살다가 문명금 할머니보다 앞서간 이름들이다. 나눔의 집 원장 혜진 스님은 “91년 정신대 출신 생존자는 190여명이었으나 그동안 40여명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할머니들이 자꾸 떠난다. 일본의 공식사과와 피해보상은 지금도 뒤늦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