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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재벌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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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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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SK 비자금 수사가 정치권을 천지개벽할 태세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선언을 이끌어내더니 한나라당 고위당직자들이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눈앞이 캄캄했다”고 고백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것 같던 한나라당이 맥을 못 추는 것을 보면서 새삼 돈의 위력을 실감한다. 대국민 사과까지 한 마당에, 이제 각 정당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와 조달방법, 사용처 등을 밝히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국민들은 오로지 정치개혁과 제도개선, 부패척결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모든 게 정치권과 검찰의 몫이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비자금 정국’의 한 당사자인 정치권이 이처럼 생사의 기로에서 요동치고 있으나, 또 다른 한 당사자가 태풍의 진로에서 비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주범’이나 다름없는데 억울한 ‘피해자’로까지 둔갑하고 있으니 혀를 찰 노릇이다. 그 당사자는 다름 아닌 재벌기업들이다. 검찰의 SK 수사가 어디까지 갈지, 다른 기업으로 확대되지는 않을지 숨을 죽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는 하지만, ‘석고대죄’의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정치자금은 관행”이라느니, “달라는데 안 줄 수 있느냐”며 정치권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으니 소도 웃을 일이다.

한 사회복지사의 비유는 촌철살인이다. “60, 70년대에는 걸인들이 거리뿐 아니라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는데, 요즘에는 지하철역 계단에서나 만나는 게 전부다. 왜 걸인들의 호별 방문이 사라진 것일까 문단속이 허술했던 단독주택들이 많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선 탓이 가장 큰 것 같다. 인심도 흉흉해져 초인종을 눌러봐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걸인들이 주택가에서 사라질 수밖에. 재벌들도 집에 찾아오고 초인종을 눌러대는 정치권에 대해 야박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비자금을 건네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야 정치권의 ‘거지 근성’을 없앨 수 있는데….”

‘보험금’이니 ‘(특혜)예약금’이니 하는 달콤한 관행에 취해 선뜻 비자금을 바치고도, 과연 억울해할 입장에 있는지 분노가 치민다. 청년실업자가 넘쳐나는 요즘, 100억원이면 연봉 3천만원의 신입사원 330여명을 1년간 채용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닌가.

재벌들의 뻔뻔함에 치를 떨다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 멋진 비즈니스>(스티브 힐튼·자일스 기번스 공저)란 제목에 눈길이 끌려 한권의 책을 손에 쥐게 됐다. 지나치게 자본주의를 미화하고 세계적인 대기업들의 활동을 홍보하는 듯한 내용은 다소 거부감이 있었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한 대목은 참신했다. 이 책은 기업들이 ‘멋진 비즈니스’를 하려면 4가지 점에 착안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분쟁을 막고 휴전을 촉구함으로써 세계평화 실현에 기여하는 일, 젊은이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등 민주주의 제도 정착에 기여하는 일, 알코올 중독이나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 예방에 기여하는 일, 빈곤지역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일이 그것이다.

한국의 재벌들도 이제 정치권과 결별하고, 어떻게 하면 사회환원을 통해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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