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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회색 이론/ 류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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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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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경제학자 츠루 시게토의 회고록을 읽고 있다. 이 책을 선뜻 구입한 것은, 한때 대표적인 ‘급진 이념서적’이던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말미에 실린 그의 논문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뻣뻣한 종이에 활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조잡한 ‘제록스’판이었건만, ‘금서’라는 말이 주는 묘한 음모가적 분위기와 막연한 동경이 뒤섞인 채 가슴 설레며 읽던 책에 실린 낯선 일본 이름은, 책 한권 떳떳하게 읽을 수 없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서글픔과 학문적으로 당당히 자리잡은 일본인의 입지에 대한 부러움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이론의 현실과 생활의 현실

츠루 시게토는 고교 재학 중 “식민지 민중의 착취와 신식민지의 약탈”에 기초한 “제국주의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깨닫고 반제동맹의 구성원으로 암약하다가 체포 제적당한 뒤,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의 하버드 대학으로 유학해 유명한 조셉 슘페터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뭐, 여기까지는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보이는 집안 좋고 재력 있는 운동권 출신 학생의 성공담 정도로 보인다. 실제 책의 내용도 그 뒤로는 외국인인 내가 보기에 별로 흥미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어쩔 수 없이 귀국하는 그가 조국에서 하게 되는 일이 조선반도와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에 ‘검은 가방’을 전달하는 쿠리에(courier) 역할이라는 점이다. 영어사전에서 쿠리에를 찾다가 발견한 ‘밀사’라는 번역어가 주는 기묘한 뉘앙스에서 출발한 나의 뜬금없는 상상력은 책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따위의 007 버전으로까지 치닫는다.

어쨌든 때아닌 80년대식 감성에 젖어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가 혹시 ‘제국주의의 주구’가 된 건 아닌가라는 객쩍은 우려를 하다가, 문득 지식인이 인식하고 판단하는 이론 속의 현실과 그가 직면하는 생활 속의 현실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져본다. 우리는 흔히 지식인 스스로가 견지하는 ‘이론의 현실’이 ‘생활의 현실’을 규정하며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론의 현실과 모순되는 생활의 현실을 좇아갈 때, 우리는 그를 현실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 예전의 흘러간 유행어에 따르자면 지식기사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정반대의 상황, 즉 생활의 현실만 보고 그 지식인의 이론의 현실을 재단해버리거나, 생활의 현실 속에 존재하는 편견이나 금기에 기초해 이론의 현실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 자체를 물리적으로 막아버리는 경향에 대해서는 쉽게 눈감거나 편승한다.


츠루 시게토의 하버드 동급생 중에는 폴 스위지와 폴 새뮤얼슨이 있었다. 학창시절 내 가방에도 들어 있던 새뮤얼슨의 <경제학>은 거의 반세기 동안 미국식 주류 경제학의 표준이었으며, 그에게 노벨상 수상의 영예보다 훨씬 실속 있는 막대한 인세 수입을 안겨주었다. 반면 슘페터의 애제자인 스위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학의 자리를 포기하고 미국 좌파의 상징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 인생경로의 극적 엇갈림에 대한 에피소드만으로도, 적어도 스무살의 혈기왕성한 내게, 새뮤얼슨보다 스위지가 더 매력적인 이유는 충분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 치열한 이론적 실천의 산물이라면, <경제학>은 기득권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나팔수일 따름이었다.

송두율과 황장엽, 그들의 이론은?

나는 엉뚱하게도 송두율과 황장엽을 둘러싼 작금의 논란, 그리고 그 반전을 보면서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경제학>을 집어던진 내 모습을 떠올리며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이 자괴감이 아직도 우리 모두에게 현재진행형임을 발견한다. ‘사람 중심의 철학’을 담담히 설파하면서 사상적 혼란이 용납되어서는 안 되며 군중을 종교적 방식으로 영도하자고 주장하는 황장엽의 <맑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이 송두율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부질없는 상상 속에는 그야말로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 알 수 없는 한국적 탈현대의 상황이 희화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오직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고 하였거니와, 오늘 우리에게 있어 과연 저 푸른 생명의 나무는 무엇일까?

류동민 | 충남대 교수 ·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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