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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기식] ‘금메달 배후조종’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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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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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射線)에 선 궁사들이 쏜 화살에 하루에도 몇번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며 가슴을 시커멓게 태우는 이들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양궁 대표팀 이기식(47) 감독은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이들 사이에서도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한다. 1988·92·96년 올림픽을 한국 양궁대표팀 감독으로 치르면서 무려 7개의 금메달을 조국에 안겼다. 그는 2000년 올림픽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양궁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해 남자개인전 금메달을 휩쓸어 ‘전 종목 금메달 획득’의 유일무이한 대기록을 지도자로서 세웠다. 1988년 올림픽 이후 양궁 종목에 걸린 18개의 금메달 중 딱 절반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이 감독의 금메달 기록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사실 선수들만 1500여명에 이르는 한국에 견줘 수십여명 남짓한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양궁 불모지 호주의 현실에서 선수 발굴과 육성이라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구나 오스트레일리아 선수들 가운데 활 쏘는 일에만 전념하는 ‘직업선수’는 단 한명도 없다. 모두 학생이나 직장인으로 일과를 마치고 잠깐씩 시간을 내어 연습을 한다니 더 이상의 메달 행진이 가능할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지난 여름 뉴욕에서 있었던 양궁세계선수권대회 남자개인전 4강에 그가 훈련시킨 두명의 앳된 오스트레일리아 고등학생이 올라간 것을 보면 이 감독의 조련을 가히 ‘미다스의 손’으로 부를 만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이와 같은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바탕으로 내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이 감독의 친정 한국팀에 강력한 도전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고국으로의 전지훈련을 앞두고 만난 이 감독의 얼굴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선수들을 엄격하고 혹독하게 훈련시키기로 유명했고, 그 자신에게도 대표팀 감독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채찍질을 해댔던 그는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시합과 인생을 누리는 법을 최근에야 배웠다고 말했다. 진실된 마음으로 선수들에게 다가가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더니 그 편안함이 선수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나아가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는 얘기다. 엄격한 기합도, 합숙훈련도 없는 오스트레일리아 양궁팀의 성공에는 이 감독의 사람 대하는 진실함이 있었다.

캔버라= 최승광 | 자유기고가 jeffrey.choi@anu.edu.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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