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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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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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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일가족 동반자살’이란 참담한 뉴스를 접하게 된다. 승용차 안에 몸을 묶고 불을 지르고, 가족을 태운 승용차를 몰고 저수지로 돌진한다. 일가족이 여행을 떠나 여관에서 약을 먹기도 한다. 자녀들과 함께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이제 낯익은 살풍경이 돼버렸다. 오죽하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죽는 것은 ‘동반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지적까지 나왔을까. ‘자살할 때는 아이들은 남겨놓자’는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통계청은 지난 한햇동안 자살한 사람을 8600여명으로 집계했으나 경찰청은 1만2천여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현장 확인을 거친 경찰청 통계가 더 정확할 것이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앞질렀다니 ‘자살 공화국’이라는 말이 만들어질 만하다.

사진/ 연합
왜 이렇게 자살이 빈발하는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경제상황이 안 좋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동기가 하나같이 빚에 몰리거나 실직 등으로 인한 생활고란 점이 이를 입증한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값이 며칠 새 억대가 오르고 거리엔 외제차가 넘쳐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상대적 박탈감도 중요한 원인이다. 빚을 갚지 않을 경우 가해지는 채권자의 괴롭힘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정해진 것도 자살을 택하게 한다.

안타까운 것은 최근의 환율과 유가 ‘쇼크’에 의해 당분간 우리 경제는 침체의 늪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과 신용불량자가 계속 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 분당과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 노무현 대통령 탈당 등으로 인해 빚어지고 있는 정치권의 대립도 경제에는 악재가 분명하다. 각종 민생·경제 법안과 추경예산, 세법 개정안 처리가 난항을 겪을 것이 불보듯하기 때문이다. 자살을 막기에는 모든 것이 역부족이다. 한마디로 자살 방지의 해법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빈부격차 해소와 극빈층 생계지원 같은 경제논리와 사회복지 차원이 아니다. 자살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찾아내 그들을 보듬어주는 행정력과 시스템이 필요하다. 자살은 10명 가운데 1명만이 ‘성공’한다는 분석도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자살을 결심한 ‘9명’이 늘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에게 다가가 자살 충동의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는 한, 언젠가는 자살이 자연사를 앞지르는 불행한 상황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답답한 마음에 늘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대통령선거 정책공약 자료집인 <새로운 대한민국 국민후보 노무현>을 집어들어본다. 노 대통령은 ‘따뜻한 대한민국’을 4대 비전 가운데 하나로 제시했고, 20대 정책목표 중에는 ‘빈부격차 해소와 중산층 70% 시대’도 포함돼 있다. 노 대통령이 당분간 당적 없이 민생·경제 문제 해결에만 전념하겠다고 하니 ‘자살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씻어낼지 지켜봐야겠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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