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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망가진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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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9-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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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사 기자들 사이에는 “뉴스가 없으면 뉴스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이 통용되곤 한다. 연말연시나 추석, 설 등 명절이 낀 연휴기간과 휴가철에 뉴스의 진원지인 ‘출입처’가 개점휴업하거나 취재원 접촉이 쉽지 않아 지면과 뉴스시간을 메우는 데 차질이 빚어질 때 하는 말이다. 이런 상황이 닥칠 것에 대비해 대부분 언론사들은 사전에 기획기사를 준비하거나 함량미달의 기삿거리라도 감지덕지하며 지면과 뉴스시간을 메우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번 추석 연휴기간은 예외였다. 아마도 기획기사와 함량미달 기사 대부분은 게재가 보류되거나 아예 쓰레기통에 들어갔을 것이다. 나라 안팎에서 굵직굵직한 뉴스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태풍 ‘매미’와 멕시코 세계무역기구(WTO) 회의, 한 농민운동가의 할복자살, 미국의 이라크 전투병 파병 요구 등이 그것이다. 언론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는지 모르겠지만 한결같이 유쾌한 뉴스가 아닌 탓에 명절 분위기는 일거에 망가지고 말았다.

사진/ 한겨레 탁기형 기자
태풍이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간 시간은 6시간30분에 불과했다. 그 시간에 100명이 훨씬 넘는 사망·실종자가 발생하고, 도시와 농촌, 육지와 바다 할 것 없이 모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자연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떠올려보다가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정부 당국의 무능에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물에 잠기고 강풍에 누더기가 된 고향을 뒤로 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려야 했던 이들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가뜩이나 실의에 빠진 우리 농촌에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우고 있다. 태풍이 오기 전, 잦은 비와 턱없이 부족한 일조량 때문에 올해 농사가 심상치 않다는 걱정을 한 것이 얼마나 부질없던지…. 태풍이 남긴 ‘23년 만의 최대 흉작’이란 우려 섞인 전망은 WTO의 끈질긴 농업개방 압력 앞에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 농민운동가의 자결은, 우리 농업의 미래처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안타까움을 더한다.

미국의 전투병 추가파병 요청은 연휴에 이어 당분간 우리를 질식시킬 것으로 보인다. 부시 대통령이 유엔을 끌어들여 국제사회로 하여금 이라크에 군대와 자금을 지원하도록 ‘작업’에 들어간 모양인데, 파병을 둘러싼 진통은 이미 시작됐고 그 파열음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WTO의 거침없는 일방통행식 세계화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미국의 일방주의적 세계전략에 맞서 유엔이 어떤 입장을 취할 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반세계화 진영을 대표하는 국제 시민사회단체 모임인 ‘세계화를 위한 국제포럼’(IFG)이 지난해 WTO와 유엔 등 국제기구에 보낸 경고의 메시지는 이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제적인 규칙이 필요한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 전체에 봉사하도록 하려면 그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동의에 근거해야 하고, 규칙의 강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가의 정부 몫으로 돌려야 한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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