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8월 호우/ 최성각

475
등록 : 2003-09-06 00:00 수정 :

크게 작게

최성각 | 소설가 · 풀꽃평화연구소장
청나라 초기에 살았던 김성탄(金聖嘆)이라는 이가 어느 여름날, 친구와 함께 열흘씩이나 쏟아지는 장맛비에 갇혔다. 둘이 평상에 앉아 그칠 줄 모르고 떨어지는 비구경만 할 수 없어 내기를 걸었다. “이보게, 우리 이 세상 살아내며 겪었던 일들 중에 박장대소할 만한 일을 한번 이어서 지껄여보지 않겠나?” 그런 내기였다. 20년쯤 지나, 김성탄은 그때 나눈 이야기들을 기억을 더듬어 ‘쾌재(快哉) 36’이라는 수필로 남긴다. 비에 갇힌 한담이어서였는지 ‘쾌재 36’의 첫 이야기는 시원한 소나기 이야기로 시작한다.

김성탄의 소나기와 지금의 호우

‘한여름인 7월, 하늘의 불덩어리 같은 해가 쨍쨍 내리쬐는데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어, 앞뒤의 뜨락이 뜨겁기가 사뭇 화로와 같아, 새 한 마리도 감히 날아오지 못하고 있다. 온몸에 흐르는 땀이 가로 세로 여울이 되고, 밥상을 마주해 앉았지만 도저히 수저를 들 수 없었다. 삿자리를 가져다가 땅 위에 깔고 누울까 했으나 바닥에 습기가 있어 끓는 기름 위에 누운 듯했고 게다가 파리떼가 날아와 목에 붙고 코에도 앉는데 아무리 쫓아도 가지는 않고, 이야말로 정말 야단이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시커먼 구름떼가 뭉게뭉게 모여들어 우르르 쾅쾅 소리를 내더니 난데없는 소나기가 마치 수백만 금고(金鼓)처럼 소리내며 줄기차게 내리는데, 처마 끝의 낙수가 폭포보다 더하였다. 비로소 몸에 땀이 홀짝 걷고, 땅의 습기도 없어지고, 파리떼도 다 흩어져 제법 밥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아니 유쾌한가.’

하지만 ‘오늘 여기’ 한반도에 장마 이후에도 줄기차게 내렸던 ‘8월 호우’는 더 이상 비에 관한 유쾌한 한담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방에서 수해가 일어났고, 사람들은 짜증을 냈고, 날씨로 장사하는 사업체들은 울고 웃었다. 이참에 이 나라의 모든 하천을 댐으로 막으려고 작정한 정부는 ‘그러므로 댐을 짓는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그들이야 같은 지역을 놓고, 가물어도 댐을 지어야 한다고 자주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니 그렇다손 쳐도, 지난 30년간 유지돼 오던 월중 강수량의 변화를 체험한 기상학자들은 ‘여름 호우를 장마의 연장으로 볼 것인가, 새로운 개념의 우기로 구분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교과서의 장마 기한을 늦춰 쓰는 일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누천년간 변하지 않던 우기는 왜 변했을까.

별의 이동이나 조석간만처럼 예측 가능한 자연현상과 달리 생명현상이나 날씨는 예측할 수 없는 복잡계(複雜界)에 속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단정해 말하기 힘들지만, 흔히 전 지구적인 기상이변의 원인을 학자들은 지구온난화로 보고 있다. 이런 조심스럽지만 설득력 있는 결론은 환경운동가들이 대중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내린 결론이 아니다. 지구생명체의 생명활동을 존속하게 해주었던 오존층 파괴의 범위는 날로 넓어지고 있고, 이미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국가폐업’을 선언한 투발루 같은 섬나라도 현실로 닥쳤다. 우리가 8월 호우에 잠겨 있는 동안 유럽은 미증유의 폭염으로 자그마치 2만명이나 사망했다. 그뿐인가, 미국에 이어 영국에서도 정전사태가 일어나 뽐내던 문명생활이 일거에 아수라장판이 되고 말았다. 기후엔진의 균형이 깨진 판에 전기문명이 흔들리는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가라앉는 배에 탄 우리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흔히 이산화탄소의 증가가 지목된다. 현재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난 42만년 동안 가장 높고, 지난 2천만년 동안에도 이보다 높았던 적은 없었다. 지금 이대로 산다면 산업혁명 이전의 세배에 도달할 것이고, 인류는 감당하기 불가능한 기상이변이라는 재앙으로 종의 절멸을 각오해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흔히 지구온난화 문제가 ‘가라앉는 배’에 비유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어떤 승객도 이 배에서 탈출할 수 없다. 지구 생태계가 닫힌 공간이기 때문이다.

1999년 4억1천만t을 배출한 한국은 세계 9위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인데, 문제는 10년간의 증가속도가 75%로서, 미국의 15%, 중국의 25%, 일본의 10%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우리네 살림살이에 대한 혹독한 반성은커녕 이 나라는 무책임한 ‘2만달러 시대론’을 다시금 시대의 화두로 내세우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 비가 멎기를 기다리며 한담을 나누던 ‘김성탄의 한담’이 그립고 부럽다.

최성각 | 소설가 · 풀꽃평화연구소장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