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불빛
등록 : 2000-10-31 00:00 수정 :
불빛이 휘황찬란합니다. 서울 서초동과 여의도에 켜져 있는 불빛입니다.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건물은 밤새도록 불이 환하고,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는 여의도 국회의사당도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썩은 구석을 도려내 추상 같은 사회정의를 세우는 게 본령인 검찰청사와, 선량들이 모여 국가의 백년대계를 논의하는 민의의 전당에 불이 밤새 켜져 있으니 나라에 희망이 가득할까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불빛은 마냥 희망의 불빛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답답한 마음만을 더하게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우선 부정부패의 왕성한 자기생명력은 한탄을 넘어 경탄마저 자아내게 합니다. 부정부패는 끊임없이 새로운 광맥을 찾아 헤매는 속성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부정부패가 새로 찾아낸 신천지는 바로 벤처였습니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오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벤처가 그런 꼴입니다. 탱자가 되고만 벤처(정확히 말하면 사이비 벤처)는 부패와 궁합이 잘 맞을 여러 조건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벤처 전체를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방죽을 흐리는 지렁이들이 너무 많은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동안 검찰청사가 환한 불빛에 휩싸였던 밤들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속시원한 결말을 본 것도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벌써부터 그런 조짐은 엿보입니다. ‘대가성’ 입증의 어려움이 벌써부터 운위되는 것도 그런 예감을 뒷받침합니다.
사실 따지고보면 사설펀드에 돈을 넣어 재산을 불리는 것은 ‘생활의 지혜’일 수도 있겠지요. 게다가 손실이 나도 얼마든지 메워준다는 확약까지 받은 상태라면 정말로 땅집고 헤엄치기입니다. 문제의 사설펀드에는 정·관계, 언론계 인사들도 상당수 돈을 넣어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 입장에서 보면 ‘죄’라고는 운없이 말썽난 펀드를 선택한 죄일 뿐이겠지요. 그 중에는 금융감독원의 장래찬 국장처럼 손실보전의 혜택을 본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가성 입증이라는 방호벽이 있는 한 처벌받는 사람은 별로 없이 끝나리라는 것이 그동안의 경험칙입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의 머리 속에는 이미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부정부패의 고리가 확연히 그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정치권은 그런 의구심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고 있습니다. ‘깃털’과 ‘몸통’의 논쟁으로 한바탕 떠들썩할 가능성도 다분합니다.
그러나 국회가 그동안 자금세탁방지법이나 부패방지법 제정을 꺼려온 점을 생각해보면 정치권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자가당착입니다. 이 법들에는 일정규모 이상의 모든 자금 거래 신고 의무화, 내부비리 또는 금전적 부정행위 고발자에 대한 보호·포상을 담은 조항 등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 국회가 제때 이 법들을 통과시켰더라면 이번 사건을 사전에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과연 국회의원들은 지금 후회하고 있을까요.
이번 사건으로 또다시 누적되는 것은 불신이요, 깊어지는 것은 냉소일 듯합니다. 이미 상처받은 민심이 결코 치유하기 힘드리라는 전망, 거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검찰청사나 국회의사당의 환한 불빛이 딱히 희망의 불빛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도 그런 연유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김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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