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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속죄는 이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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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7 00:00 수정 : 2008-11-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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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김 유족 손해배상 판결은 소멸시효 불인정 · 파격적 위자료 액수 등 과거청산의 전형 보여줘

국가의 야만적 폭력이 부른 인권유린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과거청산 과제가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한국 상황에서 이른바 ‘수지김(한국이름 김옥분)씨 사건’은,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옛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가 ‘윤태식 게이트’의 주인공인 윤태식(45·복역 중)씨한테 살해당한 김씨를 간첩으로 조작한 것으로, 분단상황과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정권 유지 수단으로 삼았던 군사독재정권의 추악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멸시효는 진실이 드러난 시점부터

사진/ 지난해 3월 수지김씨의 유족 김옥임씨가 반인도적 국가범죄 공소시효 배제 입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유족들은 사건발생 16년 만에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게 됐다.(연합)
안기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이 단순 살인사건을 간첩사건으로 조작한 내용은 윤씨에 대한 형사재판 과정에서 이미 밝혀졌고, 최근에는 국가가 유족들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액을 지급하라는 이례적인 민사소송 판결이 내려져 주목을 끌고 있다.


서울지법 민사합의41부(재판장 지대운 부장판사)는 8월14일 김씨 여동생 옥자씨 등 유족 10명이 국가와 윤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와 윤씨는 42억원의 위자료를 유족들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가기관인 안기부는 김씨가 윤씨에게 살해됐고, 김씨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북관계 등을 고려한다는 명목 아래 진실을 은폐·조작함으로써, 원고들이 김씨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고 법적으로 고인의 원한을 풀어줄 기회를 박탈했다”고 밝혔다.

이 판결은 ‘소멸시효’에 대한 그동안의 소극적인 판결에서 벗어났다는 점과 위자료 액수를 파격적으로 올렸다는 점에서 법조계 안팎의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다.

먼저, 그동안 지난 독재정권이 저질러온 인권유린 사건에서 드러난 불법행위에 대해서 그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도 소멸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에 대한 민사적 구제를 하지 않아온, 국가의 잘못을 법원이 적극적으로 인정한 점을 높이 살 수 있다. 이른바 ‘소멸시효’에 대해 보수적으로 판단하지 않은 점이다.

‘소멸시효’는 권리자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일정한 기간 계속해서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에 그 권리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제도다.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의 권리까지 보호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시작됐다. 민법상 손해배상의 소멸시효는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사건을 안 날로부터 3년이다. 특히 기존 판례는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사건을 알게 된 때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때를 기준으로 삼아왔다.

그동안 국가는 권력 차원에서 이뤄진 불법행위도 “소멸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를 들어 민사적 구제 대상에서 제외하기 일쑤였다. 삼청교육대 사건은 그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삼청교육대 사건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냈지만, 모두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이번 사건 재판과정에서도 국가는 윤씨가 김씨를 살해한 뒤 사건을 조작하고 안기부가 윤씨를 석방한 때가 1987년이므로 이미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소멸시효와 관련한 국가의 주장에 대해 “위법행위를 한 국가가 그 위법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 와서 그 위법을 몰랐던 원고들에 대해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 또는 형평의 원칙상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2001년 11월27일 수지김 살해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남편 윤태식씨가 서울지법에 첫 공판을 받기 위해 출두하고 있다.(연합)
재판부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이 아니라, 국가의 조작·은폐라는 ‘진실’을 알게 된 시점부터 소멸시효가 시작된다고 못박았다. 재판부는 그 시점을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15년이 지난 2001년 11월13일(윤태식 게이트 수사과정에서 국가의 조작·은폐 사실이 드러난 뒤 윤씨가 기소된 날짜)이라고 밝혔다.

소멸시효에 대한 적극적 판단과 함께 꼽히는 이번 판결의 의의는 위자료 액수를 형식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파격적으로 높임으로써 피해자에게는 실질적인 보상을 하고 가해자에게는 책임을 엄하게 물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김씨 유족 10명에게 42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김씨의 형제자매는 김씨를 제외하고 모두 6명이다. 형제자매 한 사람당 7억원씩 돌아가는 셈이다.

물론 이 배상액수는 피해자들이 겪은 15년 동안의 피해와 비교해보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유족들의 삶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적응한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다. 해고와 정신이상은 물론이고 형제자매들은 대부분 이혼의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고통은 2세들에까지 대물림됐다. 모두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이었다.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우리나라와 같은 남북분단 상황에서 원고들은 간첩 가족으로 몰려 15년 동안 신분상 불이익과 이에 따른 경제적 궁핍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며 “이 모든 사정을 참작해 유족 한명당 2억~7억원씩의 위자료 액수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가해자들에 대한 구상권 청구도 이어져야

이번 판결은 지금까지 법원이 손해배상 재판에서 보여준 ‘형식적인 위자료 계산법’에서 확실히 벗어나 있다. 국가의 야만적 폭력이 피해자들에게 가한 정신적인 피해에 대해 차별적인 위자료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법원은 교통사고·산업재해 등 손해배상 소송에서 사망사건의 경우라도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한 ‘위자료’(일실수입·병원비·장례비는 포함되지 않음)는 5천만원 정도로 기계적으로 적용해왔다.

법조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유족들의 피해를 하루빨리 구제하기 위해 국가가 사죄 및 재발방지 약속과 함께 항소를 포기한 뒤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가해자들에 대한 구상권 행사 조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국정원에서 사과성명을 내는 등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논란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배상액수를 다투는 항소가 별로 의미가 없다”면서 “항소 포기를 구체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형사사건을 통한 진실규명과 형사처벌→민사적 절차를 통한 피해구제→가해 당사자들에 대한 국가의 구상권 행사→국가의 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 등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이번 사건이 과거청산 해결의 긍정적인 사례로 남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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