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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불량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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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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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북부와 중서부, 캐나다 동남부 지역을 마비시킨 정전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미국이란 나라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구촌 사람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로 평가된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들어 과학문명의 미래를 선보였고, 텍사스주 크기의 소행성을 폭파시켜 지구를 구출하는 영화 <아마겟돈>을 통해 지구촌의 재난 파수꾼을 자처한 게 미국이 아니었던가. 그 덕분에 미국은 미사일 방어체계(MD)를 만들어내 군사적 패권주의에 열을 올릴 수 있게 됐으니 그 위세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사진/ GAMMA
그런 미국이 사상 최악의 정전사태를 빚은 것도 어이없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니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다. 부시 대통령이 “노후한 전력망 때문”임을 들먹이고, 클린턴 행정부에서 에너지장관을 지낸 인사가 “제3세계 수준의 전력망”이라고 비꼬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슬픈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다.

미국과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조롱 섞인 충고가 때마침 이라크에서 나오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수개월 동안 전기 없이 섭씨 50도의 가마솥더위를 견뎌내고 있는 이라크인들은 몇 시간 정전에 혼비백산하는 미국인들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한다. 한술 더 떠 이라크인들은 ‘더위 극복 10계명’을 만들어 미국인들에게 권하는 여유까지 보이고 있다. 옥상이 시원하니 잠은 지붕 위에서 자라, 카드놀이를 하며 그늘에 앉아 있어라, 바닷가를 찾아라, 샤워를 자주 하라, 얼음을 사놓아라, 거리시위를 벌여라, 발전기를 사라, 욕쟁이가 돼 스트레스를 풀어라, 후세인 추종세력이 발전소에 해코지하는지 점검하라, 정전 경험이 많은 이라크 기술자를 초빙하라. 미국 침공 뒤의 이라크 실상을 빗대어 풍자하는 내용들로, 그 표현이 통렬해 재미를 더한다. 다른 나라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현재의 미국을 되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쨌든 ‘불량’ 전력망 때문에 초강대국 미국에 망신살이 뻗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허를 찔린 미국을 보며 고소해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신용불량자가 300만명을 넘어섰고, 사생활을 엿보는 ‘몰래카메라’를 찍어 음모와 공작에 악용하는 양심불량자가 판을 치는 한국사회도 결코 건강한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는 청와대 부속실장이란 사람이 청렴을 주문하는 대통령의 뜻을 어기고 업자로부터 향응접대나 받고 돌아다녔으니, 대통령에게 그는 ‘신용불량자’인 셈이다. 현대그룹으로부터 거액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권노갑씨와 여야 정치인들은,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던 국민들과의 약속을 어겼으니 ‘양심불량자’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신용과 양심을 되찾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국제사회의 비아냥과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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