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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늦었다, 그러나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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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1 00:00 수정 : 2008-11-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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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준비로 밤을 지새는 20·30대 ‘장수생’ 열풍… 한의대·의대·약대·교대로 쏠려

이곳에 다시 오리라 예상했다=재수생/
다시 이곳에 올 줄은 몰랐다=삼수생/
나도 지난해에는 그랬지=사수생/
이놈들아 나는 니들만한 자식이 있다=장수생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대입학원 화장실 낙서’란 우스개다.

장수생은 재수나 삼수같이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없는 늦깎이 수험생이다. 원래 장수생은 사법고시 등을 준비한 30대 중·후반의 노장 수험생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요즘은 대입 수험생에까지 확대되어 쓴다. 요즘 대입학원에서 20살 재수생에 비하면 아버지뻘은 아니어도 아저씨뻘 되는 장수생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엔진오일 같은 신세는 싫다”


일러스트레이션 | 박현미
11월5일 실시되는 200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7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예전에도 20대 후반이나 30대 대입 준비생들이 있었지만 올해는 더욱 장수생 열풍이 뜨겁다.

서울 강남지역 한 대입학원 재수생반의 경우 한반 35명 중 5~6명꼴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장수생이 있다. 이 학원 관계자는 “이공계 기피 현상과 청년 실업이 장기화된 탓인지 올해는 대학 졸업반, 졸업한 취업준비생 등 20대 중·후반부터 30대까지 장수생이 많다. 주로 한의대와 의대, 약대, 교육대학 등 유망한 자격증을 딸 수 있거나 취업이 보장된 학과에 지망자가 쏠린다”고 말했다.

지난 5월 말 서울의 한 대입학원에서는 종합반 구성이 끝난 뒤에도 장수생들이 몰리자 의·약학계를 지망하는 야간종합반 100여명을 특별 모집했다. 이 학원 관계자는 “선착순으로 모집공고를 냈는데 한나절 만에 금세 정원이 차버렸다. 학생들은 상당수가 이공계열 대학 3·4학년인데 야간종합반이라 그런지 30대 직장인도 꽤 있다”고 말했다. 한편, 20대 중·후반 이상인 장수생이 아니라 대학에 들어갔으나 1학기나 1학년을 다닌 뒤 다시 대입을 준비하는 사람은 반수생이라 불린다.

김아무개(34)씨는 올 4월 말에 7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15년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대입수험생이 되었다. 김씨는 수학 등 단과반 과목을 몇개 듣고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직장 생활의 의미를 잃었다고 말했다. “요즘 직장인들이 체감정년을 체온에 빗대 37.5세라고 하잖아요. 30대 후반이면 ‘회사 나가서 뭐 먹고 사냐’며 걱정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더 늦기 전에 남의 일을 할게 아니라 평생 할 수 있는 나의 일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해 말 그가 내린 결론은 한의대 진학이었다. 고등학교 때 문과여서 의대보다는 한의대가 공부하기 나을 것 같고, 한의대가 의대에 비해 공부하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실행은 쉽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지금 수능을 준비해서 내년에 입학해도 마흔이 넘어서 개업을 할 수 있는데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며 말렸다. 몇달을 고민하던 그는 우연히 카센터에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올봄 카센터에서 차량 엔진오일을 교체하다 문득 지금 내 신세가 엔진오일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엔진오일이란 게 일정기간 동안 엔진을 잘 돌리는 구실을 한 뒤 폐기처분되고 새것으로 교체되잖아요. 회사란 엔진에서 내가 엔진오일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데, 회사 생활에 미련을 두는 게 얼마나 미련한 일인지 깨달았어요.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진/ “자격증 찾아 삼만리”. 학생과 학부모가 취업게시판 앞에서 있다(왼쪽,한겨레 김종수). 서울 서초구의 한 의대 편입 전문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장수생’이 늘어나는 추세다(오른쪽,한겨레 윤운식).

동정의 대상에서 부러움의 대상으로

한의대를 준비하는 박아무개(33)씨는 잘나가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하지만 박씨는 지난해부터 회의에 빠졌다. 아직은 하는 일도 재미있고 수입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급변하는 벤처업계의 흐름을 좇아 언제까지 프로그램을 짤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프로그램 교체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결국 감각이 떨어지면 이 업계에서 도태될 운명이란 걱정이다.

하지만 박씨는 합격 전까지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수험준비와 회사일을 같이 하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올봄부터 퇴근한 뒤 저녁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4시간가량을 공부하고 있다. 토요일과 휴일이면 집 근처 도서관으로 간다. 박씨는 “일단 하루에 4~5시간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해야 하는 게 적응하기 쉽지 않다. 최근 직장 동료나 친구들이 여름 휴가 간다 어쩐다 해서 마음이 뒤숭숭했다”고 말했다.

최근 장수생들이 한의대에 몰리다보니 30살짜리 한의대 신입생은 나이 대접을 받기는커녕 술자리에서 부지런히 삼겹살을 뒤집어야 한다는 농담도 나올 정도다.

이규삼(37)씨는 올 2월 한의대를 졸업했다. 이씨는 원래 1986년에 수도권에 있는 대학 상경계열에 들어갔다. 그는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남들보다 2년 늦게 졸업하고 제대한 뒤 대학 선배 법률사무소에서 사무장으로 일했다. 95년 결혼한 이씨는 앞날에 대한 고민 끝에 96년 다시 대입 준비를 했다. 이씨는 97년에 한의대 신입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현재 서울에서 선배 한의원에서 실무를 익히며 개업 준비를 하고 있다.

“98년까지는 고등학교나 대학 친구들 만나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어요. 사실 부끄럽기도 하고, 모임에서 친구들이 대리나 과장 승진을 한다고 직장 이야기를 하면 낄 수가 없잖아요. 제일 듣기 싫은 게 ‘너 요즘 뭐하냐’는 질문이었죠. 한마디로 또래집단에 낄 수 없는 외톨이 신세였죠. 굳어진 머리로 공부하느라 힘든데다 과외해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해야 했지요. 이런 처지니 모임에 나가도 밥값이나 술값 내는 것도 부담스럽고….”

하지만 99년 이후 이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동정의 대상에서 부러움의 대상으로 180도 바뀌었다. 98년과 99년 금융회사나 대기업 등에서 잘나가던 친구들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하루아침에 찬서리를 맞고 실업자가 되기 시작했다. “제가 3학년이 되니까 직장 다니는 친구들이 ‘안정적 수입과 사회적 지위까지 얻을 수 있다’며 저를 부러워하더군요. 친구 몇명은 한의대 입시 준비를 하겠다고 찾아와 상담을 해주기도 했지요.”

‘사오정 오륙도’ 구조의 산물

기성세대는 장수생을 곱게 보지만은 않는다. 중견 기업체 부장인 이무영(45)씨는 “신입사원 가운데 1~2년 직장생활을 하다 대학 입시 공부를 한다고 그만두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런 경우는 몰라도 30대 중·후반이 넘어서 대학 가겠다는 사람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나이쯤 되면 조직에서 허리 구실을 맡는 사람들이고 책임져야 할 가정도 있다. 조금만 따져보면 성공 가능성도 희박한 게 뻔한데 대안도 없이 덤비는 것은 무책임해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수생 열풍은 개인의 품성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구조의 산물이다. 외환위기 이후 평생 직장이 사라지고 ‘사오정 오륙도’(45살이 정년이고, 56살까지 다니면 월급도둑이라는 뜻)이란 농담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각 기업에서 50대 직장인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40대 직장인들까지 퇴출 위기에 몰리고 있다. 청년실업률도 10%에 이른다. 이런 막힌 현실에서 장수생은 20대와 30대가 택한 ‘좁은 비상구’로 보인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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