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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할머니는 기대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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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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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겨레 김보근 기자
“일본 천황과 총리를 만나는 자리에서 유엔과 세계 많은 나라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일본 정부가 우리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해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60년 전의 악몽을 꾸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대통령을 믿습니다. 우리의 기대를 이번 일본 방문에서 꼭 이뤄주십시오.”

5월28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들을 대표해 이옥선(77) 할머니가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할머니가 우리 정부에 건 마지막 기대였다. 하지만 석달 뒤 할머니의 기대는 무너지고 환멸만 남았다.

이옥선 할머니는 16살 때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다. 일본군인들은 말을 듣지 않으면 마구 칼질을 했다. 할머니의 몸에는 그때의 칼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중국에서 살던 할머니는 58년 만인 2000년 6월1일 영구 귀국했다. 하지만 할머니 가족들이 사망신고를 했기 때문에 바로 한국 국적을 얻지 못했다. 할머니는 뜻있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귀국 1년 만인 2001년 7월 어렵게 한국 국적을 얻었다. 75살에 대한민국 국민이 된 할머니는 ‘세상이 철저히 나를 버린 것은 아니구나’ 싶어 울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광복절을 이틀 앞둔 8월13일 국적포기서에 서명을 했다. 왜 할머니가 어렵게 얻은 한국 국적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걸까. 정부는 일본에게 사죄와 피해보상을 따내기는커녕 1965년 한일협정을 맺어 일제피해 보상 문제를 공식적으로 매듭지었다. ‘한일협정으로 보상 문제는 끝났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피해자들은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하라는 소송을 벌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국적 포기는 ‘방치·권리약탈·진상은폐’란 3중의 피해를 입히는 정부에 대한 일제감정 피해자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13일 오후 청와대는 할머니의 국적포기서 접수를 거부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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