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의 분노는 ‘6천만원’에 쏠리지만, 자본의 분노는 경영권 간섭으로 쏠린다. 소액주주의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하던 재벌단체들이 기업의 경영은 주주의 배타적인 권한이라 선언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글의 주제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원고마감일 며칠 전부터 애꿎은 인터넷 화면만 들여다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인터넷의 성격상 갖은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지만, 특히 먹고사는 문제와 직접 관련된 주제일 경우 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요 며칠 사이 인터넷 게시판을 달군 주제는 단연 현대자동차의 ‘연봉 6천만원, 휴가 170∼180일’인 듯하다. 진보적 성격의 게시판에서조차 비판적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고,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즐겨 사용한 노동귀족이란 개념이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현상도 퍽이나 역설적이다. 한편으로는, 다년간에 걸친 ‘인적자본투자’의 결과 박사학위를 받고 막 연구소에 취직했던 무렵, 은행대리 2년차인 대학 동기생의 연봉이 나보다 1천만원 이상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느꼈던 허탈감과 분노(?)를 회상하게 만든다.
재벌이 시장논리를 강조해?
나는 마침 지난주에 예전의 화려한 명성은 퇴색하였지만, 그래도 일본적 생산방식의 본거지로 유명한 도요타자동차의 다카오카 공장을 견학하는 기회를 가졌다. 근육통 등의 직업병을 줄이고 훨씬 쉽게 일할 수 있는 ‘라꾸라꾸 의자’의 도입을 비롯해 다양한 작업환경 개선이 이루어졌음을 홍보하는 안내원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내 눈길을 끈 것은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형형색색의 다양한 자동차 모델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조립을 해대는 한 여성노동자의 모습이었다.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에 10분 정도 휴식하면서 연평균 1800시간을 노동한다는 설명 앞에서, 나는 문득 내가 저 일을 한다면 급여가 얼마나 돼야 충분한 보상이 될까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잔업과 특근, 휴일 근무가 일상화된 자동차공장에서 ‘일년에 절반이나 놀고 경쟁력은 어디에서?’ 따위의 선정적 문구를 들먹이며 노동자의 ‘귀족성’을 강조하는 것도, 정반대로 온갖 수당은 다 빼놓고 기본급만 계산해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저 세상을 바꾸는 일은 꿈도 못 꾸고 해석하는 데에만 급급한 삼류 경제학자로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들이 더 신경 쓰인다. 민초들의 분노는 압도적으로 ‘6천만원’에 쏠리지만, 자본의 분노는 경영권 간섭으로 쏠린다. 노동조합의 경영권 참여는 시장논리의 침범이라 주장된다. 소액주주의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하던 재벌단체들이 자본주의사회에서 기업의 경영은 주주의 배타적인 권한이라 선언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지만, 시장논리에 대한 강조는 결국 재벌기업 자체가 시장논리에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문제제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연봉 6천만원’이 재벌기업과 노동귀족간의 야합의 산물이라면, 이는 현대자동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무노조경영’을 실천하면서 암묵적 담합에 의해 ‘노동귀족’들과 독점이윤을 나눠먹는 기업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조 비판의 해괴한 논리들 개발연대부터 우리를 짓눌러왔던 국가경쟁력의 논리는 전가의 보도처럼 다시금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히 독재정권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에게 체화된 논리로서 등장한다. 생산성을 올리는 방법은 인력감축이나 노동강도 강화뿐인데, 이번 노사합의로 모두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한국경제의 앞날은 없다’라는 식의 경제학 교과서를 뭉개버리는 해괴한 논리가 버젓이 중앙일간지 사설에 등장한다. 기업을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의 대립과 협력의 장소로서보다는 하나의 동질체로 인식하고, 마치 올림픽에 참가하는 국가대표 선수처럼 생각하는 논리도 등장한다. 좋은 조건에서 연습하는 선진국 선수들을 이기려면 한 숨이라도 덜 자면서 땀 흘려 연습해야 한다! 국가와 자본은 우리의 내면 속에서 완전히 동일시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청업체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조건과 재벌기업의 소비자에 대한 횡포에 관한 문제의식이 고양되고 있다는 점이지만, 그것도 ‘애국심 때문에 현대자동차를 탔지만, 이제 나라 말아먹는 현대자동차노조가 만든 차는 안 타겠다’는 논리여서는, 결론만 다를 뿐 이면에 깔린 논리구조는 완전히 동일하다. 그저 분노표출의 대상과 주제만이 바뀔 뿐,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의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분노의 끝은 허망한 자기비하거나 환상적 자기만족일 뿐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어차피 잔업과 특근, 휴일 근무가 일상화된 자동차공장에서 ‘일년에 절반이나 놀고 경쟁력은 어디에서?’ 따위의 선정적 문구를 들먹이며 노동자의 ‘귀족성’을 강조하는 것도, 정반대로 온갖 수당은 다 빼놓고 기본급만 계산해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저 세상을 바꾸는 일은 꿈도 못 꾸고 해석하는 데에만 급급한 삼류 경제학자로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들이 더 신경 쓰인다. 민초들의 분노는 압도적으로 ‘6천만원’에 쏠리지만, 자본의 분노는 경영권 간섭으로 쏠린다. 노동조합의 경영권 참여는 시장논리의 침범이라 주장된다. 소액주주의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하던 재벌단체들이 자본주의사회에서 기업의 경영은 주주의 배타적인 권한이라 선언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지만, 시장논리에 대한 강조는 결국 재벌기업 자체가 시장논리에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문제제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연봉 6천만원’이 재벌기업과 노동귀족간의 야합의 산물이라면, 이는 현대자동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무노조경영’을 실천하면서 암묵적 담합에 의해 ‘노동귀족’들과 독점이윤을 나눠먹는 기업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조 비판의 해괴한 논리들 개발연대부터 우리를 짓눌러왔던 국가경쟁력의 논리는 전가의 보도처럼 다시금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히 독재정권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에게 체화된 논리로서 등장한다. 생산성을 올리는 방법은 인력감축이나 노동강도 강화뿐인데, 이번 노사합의로 모두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한국경제의 앞날은 없다’라는 식의 경제학 교과서를 뭉개버리는 해괴한 논리가 버젓이 중앙일간지 사설에 등장한다. 기업을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의 대립과 협력의 장소로서보다는 하나의 동질체로 인식하고, 마치 올림픽에 참가하는 국가대표 선수처럼 생각하는 논리도 등장한다. 좋은 조건에서 연습하는 선진국 선수들을 이기려면 한 숨이라도 덜 자면서 땀 흘려 연습해야 한다! 국가와 자본은 우리의 내면 속에서 완전히 동일시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청업체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조건과 재벌기업의 소비자에 대한 횡포에 관한 문제의식이 고양되고 있다는 점이지만, 그것도 ‘애국심 때문에 현대자동차를 탔지만, 이제 나라 말아먹는 현대자동차노조가 만든 차는 안 타겠다’는 논리여서는, 결론만 다를 뿐 이면에 깔린 논리구조는 완전히 동일하다. 그저 분노표출의 대상과 주제만이 바뀔 뿐,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의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분노의 끝은 허망한 자기비하거나 환상적 자기만족일 뿐이다. 류동민 | 충남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