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집짓기 자원봉사의 뜨거운 체험…뿌듯한 마음으로 수재민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과정
‘의식주’(衣食住)라는 단어에서 집을 뜻하는 ‘주’는 맨 마지막에 나온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말에는 아예 주(住)가 빠져 있다. 옛날에는 집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보다는 입을 것, 먹을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헐벗음, 굶주림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오늘날에는 ‘걱정 없이 살아갈 내집’이야말로 사람이 예절을 차릴 수 있는 기본조건이 아닐까?
강릉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태풍 루사가 강원도 지역을 할퀴고 간 지난해 여름, 집을 잃은 사람들중 상당수는 아직도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살고 있다.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연합회’가 올해 집짓기 행사(한국번개건축, 2003)를 강릉과 삼척 지역에 집중하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졸지에 조장이 되다
공사판의 잡역부, 그것은 결코 신선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의 집짓기’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행사 시작보다 하루 늦은 8월5일(화요일) 저녁 강릉에 도착해, 다음날 아침 자원봉사자들이 묵고 있는 관동대학교로 갔다. 연합회에서 받은 하루 일정표에는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아침식사, 8시반까지 작업장에 도착해 9시에 일을 시작한다고 돼 있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2km가량 떨어진 공사장에 도착하니 벌써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로 공사판이 부산하다. 이날 강릉 현장의 자원봉사자는 600여명. 그 중 여성 참가자가 절반을 넘었다. 강릉의 공사는 한동에 4세대가 들어갈 수 있는 이층집 5채를 짓는 일이다. 한달 전인 7월4일 첫 삽을 뜨고 난 뒤 전문가들의 작업으로 이미 콘크리트 기둥이 다 세워져 있었다. 게다가 전날 작업으로 외벽공사가 거의 마무리됐고, 지붕을 올릴 준비까지 끝나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 경건회. 해비타트가 종교를 초월한 운동이라지만,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다보니 경건회의 모습도 기독교의 예배와 닮은 점이 많다. 짧은 ‘강론’에 이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를 같이 부르고 기도를 한다. “해비타트”라는 진행자의 외침에 “오, 예스”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마침내 일이 시작됐다. 건물마다 건축전문가인 리더가 있고 작업팀장이 있지만 작업 지휘는 체계적이지 못하다. 여러 해 동안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사람들은 ‘조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은 줄을 어떻게 서느냐에 따라 배정된다. 나는 건물 1동에서 내부공사를 하는 8명의 작업조에 편성됐다. 8명을 다시 2개의 작업조로 나눠보니, 1개조에는 앳된 고등학생들뿐이다. 작업팀장은 나를 학생들 틈에 끼워넣고 학생들을 챙기란다. 졸지에 새끼 조장이 됐다. 우리가 맡은 일은 벽 안쪽에 유리솜을 대고 그 위에 석고보드를 붙일 수 있도록 안쪽 벽에 각목으로 지지대를 다는 일이다. 안쪽이 보이지 않는 외벽 바깥쪽에서 못질을 해야 하는 것만 빼면 그다지 힘이 드는 일은 아니다. 어려움은 뜻밖의 곳에 있었다. 폐자재를 재활용하기 위해 먼저 못을 빼야 하는데, 한번도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고등학생들은 장도리조차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다. 그래도 그들은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 마냥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럭저럭 자재를 확보하고 못을 박아나가니 금세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고, 안전모가 자꾸 귀찮아진다. 해비타트는 자원봉사 축제
일을 빨리 끝내려면 자원봉사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특히 빈 자리를 메워주는 일이 중요하다. 오후가 되자 학생들은 2동쪽에 자꾸 눈길을 보낸다. 해비타트 홍보가정으로 위촉된 탤런트 차인표씨가 오후부터 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움직이는 곳마다 몇대의 카메라가 따라다녔다. 전날 탤런트 이휘향씨가 다녀갔고, 이재룡·유호정 부부도 금요일에 온다고 했다. 중년의 자원봉사자 한분이 우리 조에 들어와 궂은 일을 도맡아해준다.
일에 제법 익숙해졌는데, 이날은 평소보다 1시간 이른 오후 4시께 작업을 마무리한단다. 밤에 평창으로 오페라를 보러간다는 것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을 태운 5대의 버스가 1시간만에 평창 용평면의 메밀꽃 오페라학교에 닿았다. 일주일간의 ‘문화관광체험축제’ 중 하루를 해비타트 자원봉사자의 밤으로 정해놓았던 것이다. 김유정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 <봄·봄>의 공연에 이어, 오페라 속의 한국 전통의상쇼가 자원봉사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해비타트는 자원봉사 축제”라고 누군가 한 말이 생각났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잠들어 있었다. 젊은이들의 얼굴엔 보디페인팅 자국이 아직 선명하다.
이틀째인 목요일 아침, 빗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식사가 끝났는데도 굵은 빗줄기가 여전하다. 위험한데다 공사 진척도 빠른 편이어서 오전에는 ‘일단 대기’라고 한다. 이러다가 일은 안 하고 쉬다가 돌아가는 거 아냐? 걱정이 됐다. 10시께 내부작업을 할 사람 50명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얼마나 반갑던지.
현장에는 옷을 맞춰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건축자재를 후원하고 있는 라파즈-한라시멘트 직원들이었다. 실뱅 가르노 사장이 함께 와 있었다. 자원봉사자로 참가하는 직원들에게는 회사쪽에서 유급휴가를 줬다고 했다. 2동의 천장 작업이 우리에게 떨어졌다. 몇해 연속 참가한 사람들이어선지 이들은 대부분 ‘준프로’였다.
오후에는 날이 개면서 현장이 다시 북새통을 이룬다. 천장작업이 일찍 끝나고 시간이 남자,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자원봉사자들이 석고보드를 나르기 시작한다. 누군가 석고보드를 가져다, 굵은 펜으로 자신의 바람을 적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달려든다. ‘천년만년 가는 집’이라고 나도 한줄을 보탰다.
“유리가루가 피부를 파고 들어와…”
그동안 외부 숙소에 머물던 나도 이날 밤엔 기숙사로 들어갔다. 일부 자원봉사자들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자리가 났기 때문이다. 이층침대 2개와 책상 4개가 마련된 5평가량의 4인용 숙소다. 같은 방에 머물던 사람은 한 공기업에서 ‘탐색차’ 참가한 신입사원, 그리고 누나와 함께 참가한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만 18살이 안 된 학생들은 보호자를 동반해야 한다. 첫날 나와 함께 일한 고등학생들은 서울 용산고 학생들이었고, 오후에 나를 도운 중년남자는 학생들의 보호자로 참가한 서강대 이승훈 교수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장님도 교수님도, 물론 기자도 다 잡역부일 뿐이다.
자원봉사자 수가 워낙 많다보니 숙소 마련은 만만치 않은 일이라고 했다. 강릉의 자원봉사자들은 대학 기숙사를 이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삼척에서는 여관을 빌려 방 하나에 대여섯명씩 묵고 있다고 했다. 물론 숙박비는 자원봉사자들이 낸 ‘참가비’로 충당한다. 자원봉사자들은 일반인의 경우 23만원 안팎, 학생은 16만원 안팎의 참가비를 내야 한다. 기숙사 뒷쪽에서 한 외국계 기업의 단체 참가자들이 생맥주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소양강 처녀>를 합창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축제는 그렇게 이어졌다.
사흘째인 금요일, 오랜만에 근육을 쓴 탓인지 벌써 팔다리가 무겁다. 팔뚝엔 뾰루지가 무성해 자꾸 가렵다. 첫날 유리솜 작업을 해서인지도 모른다. “유리가루가 피부를 파고 들어갔다가 며칠 지나 나온다”던 작업팀장의 말이 생각났다. 이날 일은 1동 처마 밑에 소핏을 붙이는 작업이다. 작업팀장 황유승씨와 4년째 자원봉사자로 참가 중인 라파즈-한라시멘트 최성진씨가 지휘하고 용산고 학생들이 달라붙었다. 전동드릴을 이용해 나사못을 박는 게 내 일이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작업을 멈추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알고 보니 내가 일하는 1동에서 안전사고가 생겼다. 지붕 근처의 작업계단에서 일하던 한 자원봉사자가 2층 계단으로 떨어진 것이다. 외상은 없어보였지만 병원으로 실려갔다. 전날에도 2동에서 사고가 생겼다고 했다. 한 여성 자원봉사자가 전동톱을 사용하다 팔등 부분의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를 입고 서울로 후송됐다는 것이다. 처마 밑 작업은 오후까지 하면 곧 끝날 듯했다. 전동드릴 작업은 위험하지 않은 일이어서 나는 고등학생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오후에는 기사 마감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작업팀장이 막지 않는다.
라파즈-한라시멘트의 실뱅 가르노 사장, 볼보건설기계코리아의 에릭 닐슨 사장은 전날에 이어 이틀째 직원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잠깐 얼굴만 내밀고 사진 찍고 가는 이들과는 달라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특별히 인터뷰하지 않았다. 나도, 그들도 단지 일을 하러 온 것이므로. 인근 공군부대에서 100여명의 군인이 지원을 나오니 공사판의 색깔은 더욱 다채로와졌다. 노란 조끼를 걸쳐 입은 입주가족들은 늘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물론 그들이 공짜로 집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니다. 500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하고, 건축비 원금도 매달 10만원 안팎씩 18년 동안 상환해야 한다.
입주자들의 기쁜 모습에 피로가 가신다
오전 일을 마치고 먼저 작업장을 떠나려니 그동안 일한 1동 건물에 자꾸 눈길이 간다. 지붕을 잇는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집은 이제 거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내벽에 석고보드를 붙이고, 도배를 하는 등 이제 몇 가지 작업만 남았다.
“다 짓고 가야 하지 않느냐”며 악수를 청하는 자원봉사자들을 뒤로 하는 것이 못내 서운했다. 올해 강릉·삼척 지역 사랑의 집짓기 행사에 참가한 자원봉사자는 모두 1800여명. 그들이 흘린 땀에 나는 그저 몇 방울을 보탰을 뿐인데도, 서울로 돌아오는 내 몸은 어느 때보다 가벼워져 있었다. 한국 해비타트본부 관계자가 소식을 전해왔다. “행사 마지막날인 토요일 오후 입주가족들에게 열쇠를 건넸습니다. 입주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시죠.” 비록 헌정식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해비타트. 오 예스”란 구호가 다시금 귓전을 때린다.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정녕 축제였다.
강릉=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해비타트 자원봉사는 땀의 축제에 참가하는 일이다. 망치질을 하고 있는 정남구 기자.
공사판의 잡역부, 그것은 결코 신선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의 집짓기’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행사 시작보다 하루 늦은 8월5일(화요일) 저녁 강릉에 도착해, 다음날 아침 자원봉사자들이 묵고 있는 관동대학교로 갔다. 연합회에서 받은 하루 일정표에는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아침식사, 8시반까지 작업장에 도착해 9시에 일을 시작한다고 돼 있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2km가량 떨어진 공사장에 도착하니 벌써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로 공사판이 부산하다. 이날 강릉 현장의 자원봉사자는 600여명. 그 중 여성 참가자가 절반을 넘었다. 강릉의 공사는 한동에 4세대가 들어갈 수 있는 이층집 5채를 짓는 일이다. 한달 전인 7월4일 첫 삽을 뜨고 난 뒤 전문가들의 작업으로 이미 콘크리트 기둥이 다 세워져 있었다. 게다가 전날 작업으로 외벽공사가 거의 마무리됐고, 지붕을 올릴 준비까지 끝나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 경건회. 해비타트가 종교를 초월한 운동이라지만,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다보니 경건회의 모습도 기독교의 예배와 닮은 점이 많다. 짧은 ‘강론’에 이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를 같이 부르고 기도를 한다. “해비타트”라는 진행자의 외침에 “오, 예스”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마침내 일이 시작됐다. 건물마다 건축전문가인 리더가 있고 작업팀장이 있지만 작업 지휘는 체계적이지 못하다. 여러 해 동안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사람들은 ‘조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은 줄을 어떻게 서느냐에 따라 배정된다. 나는 건물 1동에서 내부공사를 하는 8명의 작업조에 편성됐다. 8명을 다시 2개의 작업조로 나눠보니, 1개조에는 앳된 고등학생들뿐이다. 작업팀장은 나를 학생들 틈에 끼워넣고 학생들을 챙기란다. 졸지에 새끼 조장이 됐다. 우리가 맡은 일은 벽 안쪽에 유리솜을 대고 그 위에 석고보드를 붙일 수 있도록 안쪽 벽에 각목으로 지지대를 다는 일이다. 안쪽이 보이지 않는 외벽 바깥쪽에서 못질을 해야 하는 것만 빼면 그다지 힘이 드는 일은 아니다. 어려움은 뜻밖의 곳에 있었다. 폐자재를 재활용하기 위해 먼저 못을 빼야 하는데, 한번도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고등학생들은 장도리조차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다. 그래도 그들은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 마냥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럭저럭 자재를 확보하고 못을 박아나가니 금세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고, 안전모가 자꾸 귀찮아진다. 해비타트는 자원봉사 축제

만 18살 미만의 미성년자는 인솔자가 동반해야 한다.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고교생들(위). 지난해 수해를 입은 강릉에는 20가구가 들어갈 수 있는 집 5채가 지어졌다.

땀에 흠뻑 젖은 기자(위). 석고보드에 입주자들을 축복하는 글을 쓰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아래).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