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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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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13 00:00 수정 : 2008-11-2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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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에서 성폭행당한 뒤 살아남은 ㄱ씨의 국가상대 손해배상 소송과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

8월4일 오후 한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자는 ‘성폭력 생존자 국가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지지하는 사람들’(이하 ‘지지하는 사람들’), 제목은 ‘성폭력 생존자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보도요청’이란 보도자료였다.

성폭력 ‘생존자’가 8월4일 국가와 울산시를 상대로 1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왜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란 낱말을 쓸까. 성폭력 피해자가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문제의식은 뭘까. 이를 알려면 지난 1년 동안 생존자 ㄱ(28)씨가 겪은 일을 살펴봐야 한다.

왜 ‘피해자’ 아닌 ‘생존자’인가

사진/ “우리는 분노한다. 그리고 증언한다.” 7월11일 사건 발생 1년이 되는 날 ‘평등세상을 여는 울산여성들’ 교육관에서 ‘성폭력 없는 세상을 위한 여성행동의 날’ 행사가 열렸다.
ㄱ씨가 법원에 낸 손해배상 청구소장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설명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학습지 교사인 ㄱ씨는 지난해 7월11일 밤늦게 울산 북구 명촌동 한 아파트에서 학습지 가정방문을 마쳤다. 그는 택시나 버스를 타고 집에 가기 위해 현대자동차 명촌정문 입구에서 명촌로터리 방향으로 인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런데 30대로 보이는 남자 두명이 갑자기 뒤에서 ㄱ씨의 목을 조르고 팔을 비틀어 도로 곁의 농수로 둔덕으로 끌고 갔다. 남자 2명은 번갈아 ㄱ씨를 성폭행하고 돈을 빼앗아 달아났다.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두메산골이 아니라 760가구 아파트단지에서 나오는 폭 20m가 넘는 왕복 8차선 큰길 옆이었다. 바로 옆에 버스정류장도 있고 아파트 주민들이 장보러 가고 퇴근하고 운동하러 다니는 일상적인 공간이다. 생존자가 정신적 상처를 크게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 당시 이 길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사건 발생 전에도 주민들이 ‘불안하다’고 행정기관에 가로등 설치를 요청했지만, 울산시는 아파트 건설업자에게 책임을 미루고, 건설업체는 울산시에 책임을 미루었다”고 밝혔다.

범인들이 달아난 뒤 ㄱ씨는 몸도 추스리지 못한 상태에서 도로로 뛰어나왔다. 그는 마침 주변을 순찰하던 경찰순찰차에 성폭력 사건을 신고했다. ㄱ씨는 경찰에게 현장보전 조처와 현장 수색을 요청했으나 경찰은 ‘지금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절차가 필요하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ㄱ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성폭행 증거를 찾는 동안 ㄱ씨가 속한 여성단체 동료들은 사건현장으로 가서 현장보존과 수색을 하기도 했다.

사건 다음날인 7월12일 오후 경찰과 ㄱ씨 친구들이 참여한 가운데 현장검증이 있었다. 현장검증을 하던 경찰은 ㄱ씨에게 범행현장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것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느냐’며 짜증을 냈다. 또 이날 현장검증 도중 경찰은 ㄱ씨만을 따로 불러 “성경험이 있느냐” “시집을 가야 하니 주위에 많이 알리지 마라” 등 굴욕감을 주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성폭력 국가배상 소송’은 전례 없는 일

사진/ 지난해 7월11일 성폭력 사건이 일어난 곳은 아파트 단지 근처 큰길 옆이었다.
처음 ㄱ씨는 범인들을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수사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수사과정에 의견을 내고 경찰에 범인 몽타주 작성을 요구했으나 ‘이런 사건에 적절한 수사방법이 아니다’고 거절당하고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이 아니냐’고 면박을 당했다. 경찰은 관내 강력사건이 터지면 수사인력을 빼갔고 1년 동안 사건 담당 형사가 3차례 바뀌었다. 사건 발생 1년이 지났지만 경찰은 범인 검거는커녕 자주 바뀐 담당 형사는 사건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애초 수사에 기대를 걸었던 ㄱ씨는 경찰을 만나고 온 어느 날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좌절감에 젖어 있던 ㄱ씨에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만약 수사당국이 정신 차려서 가해자를 검거한다고 한들 내가 이런 범죄의 피해자가 또다시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소름이 쫘악 끼치더라고요. 성폭행을 당한 뒤 제 자신도 알 수 없었던 어떤 공포감, 두려움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란 걸 알게 된 겁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는데, 국가는 버스정류장 옆 큰길을 걷는 나의 안전도 보호해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건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닌가. 그래서 국가에 대해 성폭행 사건으로 인해 제가 입은 명백한 피해와 또다시 반복되는 위험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는 책임을 묻기로 한 겁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를 국가더러 손해배상 하라는 소송은 나라 안팎에서 전례가 없었다. 법률적으로나 사회 통념상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ㄱ씨는 “다들 포기하라고 하는데 내가 느끼는 이 분노와 억울함과 공포와 두려움을 어쩌란 말이냐. 나는 분노를 참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참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소송관련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ㄱ씨와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송을 준비하면서 이 문제를 두고 법률가들의 다양한 도움말을 듣고 신중하게 토론을 거듭했다.

1인 1만원 ‘아름다운 동참’

‘지지하는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국가 상대 소송을 결정한 배경에 대해 “헌법 11조는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존엄성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1시간17분에 한건의 성폭행이 일어나는 성폭력 공화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가는 이를 해결할 구체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ㄱ씨는 소장에서 국가는 범죄를 예방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경찰 수사과정에서 피해자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발언을 했고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아 정신적 고통을 가했고 △울산시는 가로등 관리 규정을 위반하여 범인들이 범죄행위를 용이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ㄱ씨를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라고 부른다 .

“성폭력은 생존자에게 신체적 상해와 정신적·사회적 살해를 가져오는 범죄다. 생존자란 엄청난 폭력 앞에 살아남은 자란 의미와 폭력을 극복하고 앞으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낼 자란 의미에서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라 부른다.”

‘지지하는 사람들’은 생존자의 이런 용기가 닫혀 있던 여성들의 입을 열게 하고, 잠자던 법을 깨우고, 허술한 제도를 고치고, 피해자가 또다시 피해자가 되는 수사관행을 바꾸고,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개인적 사고’로 여기던 성폭력 범죄가 국가와 국민이 해결해야 할 ‘사회적 범죄’로 자리매김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ㄱ씨의 소송에는 ‘성폭력 없는 세상을 위한 아름다운 동참’을 하는 300여명이 함께한다. 이들은 인터넷에 ‘성폭력 생존자 국가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지지하는 사람들’(http://home.freechal.com/womrights)을 만들어 1인 1만원 소송비용 모금 등을 하고 있다. 온라인 모임은 여성만 가입할 수 있고 남성들은 모금에 동참할 수 있다.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좋은 취지라고 소송 비용으로 목돈을 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여성들이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는 의미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1인당 1만원을 내서 소송 비용을 마련했다. 동참한 사람들은 여성 운동가들만 아니라 대부분 50·60대 평범한 아주머니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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