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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손님~ 집회 예약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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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07 00:00 수정 : 2008-11-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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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허위 신고로 다른 단체 집회 원천봉쇄… 집시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잠들다

집회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때에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것을 말한다. 또 이들이 행진 등의 방법을 통해 ‘위력이나 기세’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두고 시위라고 부른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유권 가운데 하나. 국민이 자신의 정치·사회적 의견을 집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집회나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했던 시대는 갔다. 집회 시작 48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에 ‘옥외집회 신고서’만 제출하면 언제·어디서·누구든 집회나 시위를 벌일 수 있다. 물론 ‘독소조항’은 남아 있다. 대사관 주변 100m 안에서는 집회를 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일부 대기업은 발빠르게 본사 건물에 대사관을 유치해 집회·시위 ‘원천봉쇄’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회 민주화와 함께 집회·시위의 자유가 크게 확장됐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진/ 서울 성북구 성북2동 대기업 ㅎ건설 회장집 근처에는 단체와 개인이 1년 내내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했지만 실제 집회가 열린 적은 한번도 없다.(박승화 기자)
서울 성북구 성북2동 주택가에서는 올 한해 하루도 빠짐없이 서너건의 집회가 열린다. 적어도 경찰에 접수된 ‘옥외집회 신고서’ 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이들 집회는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고급 빌라가 즐비한 도심 주택가에서 1년 내내 집회를 벌이겠다고 신고한 이들의 정체는 뭘까?

도심 주택가에서 1년 내내 시위?


“대기업 ㅎ건설 회장과 중소업체 ㅇ시멘트 사장이 그 근처에 살고 있다. 예전에는 노조와 업체 관련 이해 당사자들이 종종 그 사람들 집 부근에서 소규모 피켓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확언할 순 없지만, 그런 시위를 막아볼 생각으로 집회 신고를 냈을 수도 있다.” 관할 성북경찰서 관계자는 말을 아꼈지만, 집회의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집회 장소를 선점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성북2동 성북빌 하우스 주변은 지난 1월2일부터 6월30일까지 자동차 오래타기 시민모임이라는 단체가 ‘자동차 10년 타기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집회 신고서를 냈다. 물론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이어 7월1일부터 오는 12월31일까지는 북한 핵무기 보유 반대 시민모임이 ‘북한 핵무기 보유 반대 시민 궐기대회’를 열기로 했다. 역시 아직까지 궐기대회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는 게 경찰쪽 설명이다. 또, 성북2동 330-347번지 주변에도 1년치 집회 신고가 돼 있다. 금연운동 확산 시민모임과 독도사랑 시민모임이 상·하반기로 나눠 각각 ‘금연운동 시민홍보’와 ‘독도사랑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 지난 6월1일부터 9월 말까지는 회사원이라고 자신을 밝힌 여아무개씨가 주변 환경정화 캠페인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 단체와 개인이 한 집회 신고의 목적이 ‘불분명’할 뿐 아니라, 실제 집회가 열리지 않거나 아직 열리지 않고 있어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성북2동 주택가에서는 어느 누구도 집회를 벌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진/ 대규모 집회·시위가 자주 벌어지는 장소마다 어김없이 예약이 끝난 상태다. 지난해 서울 종로5가 종묘에서 열린 사립학교법 개정 촉구 시위.(강재훈 기자)
90년대 말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허위·위장 집회 신고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는 탓이다. 대규모 집회·시위가 자주 벌어지는 장소마다 어김없이 예약이 끝난 상태다. 짧게는 1~2달에서 길게는 6개월~1년 단위의 집회 신고가 넘쳐나지만, 정작 행사가 제대로 열리는 사례는 많지 않다. 장기 집회 신고 대부분이 필요한 때 원하는 집회 장소를 사용하기 위해 미리 신청한 ‘장소 선점용’이거나, 다른 단체의 집회를 막기 위한 ‘위장·대응용’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장소는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

지난 7월3일 전국언론노조 KBS지부(위원장 김영삼)는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KBS 결산안 국회 부결’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노조는 애초 맞은편에 위치한 한나라당사 앞에서 집회를 계획했었다. 그러나 민주참여네티즌연대라는 단체가 오는 12월 말까지 ‘자유수호를 위한 국민운동’이라는 집회를 벌이겠다며 이미 장소를 선점한 상태였다.

노조원들이 이날 오전 11시 신고한 대로 국민은행 앞에서 집회를 시작할 때까지 한나라당사 앞에서는 집회가 열리지 않았다. 집회 도중 노조원들은 자연스럽게 한나라당사 앞 ‘빈자리’로 장소를 옮겼다. 이에 경찰은 신고된 집회 장소가 아니라며 이들을 막고 나섰다. 몸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충돌이 빚어지면서 부상자가 속출하는 살풍경이 연출됐다.

이날 경찰이 노조원들의 집회를 막은 근거는 집시법의 이른바 ‘경합집회 금지’ 규정이다. 현행 집시법 제8조를 보면, “시간과 장소가 경합되는 2개 이상의 집회 신고가 있고, 그 목적으로 보아 서로 상반되거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뒤에 접수된 집회 또는 시위의 금지를 통고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 규정의 목적은 같은 장소에서 상반된 시위가 벌어져 참가자들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집회 기간과 장소를 구체적으로 제한하지 않은 법 규정 때문에, 이를 악용한 위장집회 신고 사례가 빗발치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현행 집시법은 한마디로 선착순이 원칙이다. 집회 장소는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고, 집회 기간에 대한 제약도 없다. 집회가 신고한 대로 열리지 않더라도 아무런 제재 수단이 없다”고 지적했다.

사진/ 한나라당사 앞에서 열린 1인 시위. 현재 민주참여네티즌연대라는 단체가 오는 12월 말까지 집회를 열겠다며 이곳을 선점해 놓은 상태다.(강재훈 기자)
지난 7월 한달 동안 서울 경찰청 산하 각급 경찰서에 접수된 집회·시위는 모두 5900여건에 달한다. 하루 평균 190여건에 달하는 수치다. 200건 이상 집회·시위가 예정됐던 날만도 무려 14일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 집회 상당수가 신고한 대로 열리지 않았다. 서울 경찰청 관계자는 “실제 벌어지는 집회·시위는 하루 평균 50여건에 불과하다. 1달 이상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한 것 대부분이 며칠만 열리거나 아예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2002년 84% 허위 신고

사정이 이렇다보니 집회 장소를 선점하기 위한 각급 단체들간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둘레가 17km에 달하는 용산 미8군 기지 주변은 이런 경쟁의 대표적인 장소로 꼽힌다. 이곳 일대는 지난해 친미 성향의 자유시민연대가 1년 내내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했었다. 결국 반미단체들은 지난 한햇동안 미군기지 주변에서는 집회를 벌일 수 없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올해는 용산미군기지반환운동본부·전국연합·민중연대 등 반미단체들이 일찌감치 전쟁기념관과 국방부 등 미군기지 주변 일대에 모두 4건의 장기 집회 신고서를 냈다.

친미·반미단체 양쪽 모두 “집회 장소를 장기간 독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원하는 때 원하는 장소에서 집회를 열 수 없다. 집회를 하지 않으면서도 일단 자리를 잡아놓고 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집회 신고의 목적이 처음부터 다른 집회를 막기 위한 ‘위장·대응용’인 경우도 흔하게 눈에 띈다. 이익이 충돌하는 지점이면 어김없이 위장·대응용 집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형태의 집회 신고가 빈번한 곳 가운데 하나로 각종 지역 현안과 관련한 민원성 집회가 끊이지 않는 각급 구청 앞마당을 들 수 있다.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지난 4월1일부터 9월 말까지 6개월 동안 노원구청 앞에서 집회를 벌이겠다는 신고서를 관할 도봉경찰서에 냈다. 행사명은 ‘민원발생 소음 야기시키는 노원구청 각성 결의대회’. 민원성 집회가 빗발치면서 매일이다시피 귓가를 괴롭히는 확성기 소리에 참다못한 주민들이 ‘소음 퇴치책’으로 집회 장소를 선점해버린 것이다.

대규모 집회가 빈번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도 당분간 ‘조용하게’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부터 3개월 단위로 각각 △대학로 문화발전 추진위원회(4~6월) △대학로 다중집회 방지위원회(7~9월) △대학로 상가인 연합(10~12월) 명의로 집회 신고가 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 집회 신고서는 문화사업가라고 자신을 밝힌 임원빈(54)씨 혼자 냈다. 임씨는 “대학로와 동숭동 일대는 특별한 문화지역이다. 문화공간에 걸맞게 조용하게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집회 신고서를 냈다. 내년에도 공원 일대에 집회 신고서를 내는 일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1년께부터 집회 신고서를 내오고 있다.

사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자신을 문화사업가라고 밝힌 임원빈씨가 혼자 집회신고를 내어 올해도 ‘조용한 상태’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박승화 기자)
경찰청에 따르면, 신고만 하고 집회를 하지 않는 비율은 2000년 68%, 2001년 80%, 2002년 84%으로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다. 이를 두고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허위·위장 집회 신고를 하는 건 우리 사회의 뻥튀기 예약문화와 닮은꼴”이라고 꼬집는다. 그는 “항공사에서도 예약을 해놓고 실제 탑승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해 벌과금 규정을 두지 않느냐. 집회·시위 역시 신고 내용대로 진행하지 않을 경우 벌칙 규정을 둬 장소 선점의 거품을 빼야 한다”고 강조했다.

1년8개월째 ‘입법 심의 중’

허위·위장 집회의 폐단을 막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99년 96건에 머물렀던 1개월 이상 장기 집회 신고건수가 2000년 333건, 2001년에는 2015건 등으로 폭발적으로 늘면서 장소 선점을 노린 장기 집회 신고를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 박종희 의원을 중심으로 여야 의원 23명이 공동 발의해 집시법 개정안을 그해 11월30일 국회에 제출했다.

개정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현재 제한을 두지 않고 있는 1회에 개최할 수 있는 집회 및 시위기간을 7일로 제한하고 △집회 및 시위신고를 한 뒤 취소신고를 하지 않는 채 집회를 개최하지 않을 경우에는 일정 기간 동안 같은 목적의 집회·시위를 개최할 수 없도록 하는 한편 과태료 처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규정을 새로 두기로 했다. 하지만 2001년 12월5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상정된 개정안은 1년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입법 심의 중’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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