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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책의 공유/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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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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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교사·<작은 친절> 지은이
내가 읽은 책을 지인들에게 권하는 즐거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중 하나다. 책을 정독하는 편이고 연필을 들고 밑줄 그어가며 읽기도 하고 언제부터인가 생긴, 메모해두고 싶거나 다시 읽고 싶은 페이지의 아래 위 한 귀퉁이를 작게 접어두는 버릇 탓에 내가 읽은 책은 그리 깨끗하지 못한 상태이기 일쑤이다. 그런 책이지만 나는 자꾸만 그 책들을 내밀게 된다. 물론 그 책들을 돌려 받을 생각은 없다. 가끔은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혹시 옆에 그 책 읽었으면 하는 사람 있으면 주세요.”

앞장에 내 이름을 지운 이유

책읽기에서는 아주 잡식성인지라 읽은 책을 누구에게 권할까를 고민하는 것 또한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책 읽을 사람을 골라가며 권하다보니 오랫동안 만난 한 선배 집에는 내가 권한 책들만 꽂아두는 책장이 생겼단다. 내가 권한 책들만 모아두는 책장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선배 하는 말이 "영미씨, 어느 날부터 책에 이름이 없더라. 예전에는 책 맨 앞장에 자기 이름 석자가 있거나 동생이 돌에 새겨주었다고 자랑하던 네모난 도장이 찍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없어졌어. 그렇지?"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다 읽고 나면 맨 앞장에다 내 이름을 꼭 적어두곤 했다. 그 습관은 오래 지속되었고 내 즐거움을 아는 조각을 전공한 동생이 내 이름 석자를 네모난 돌에다 새겨주어 그 즐거움에 보탬을 주었다. 낙관을 찍듯이 한권의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책의 앞장에 산뜻한 느낌의 돌 도장을 찍는 즐거움을 나는 너무도 사랑했다.

그런 내가 책에 내 이름 쓰는 것을, 돌 도장 찍는 것을 그만두었다. 책을 좀더 자유롭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자취하고 있는 제자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혼자 살고 있는 아이이고 보니 책을 살 만한 여유가 없는 터라 그 아이가 읽는 책은 대부분 내가 권한 것들이다. 아이 책상에 있는 책을 무심코 펼쳤는데 그곳에 선명하게 내 이름 석자가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있으면 안 될 곳에 내 이름이 적혀 있다는 생각과 함께 심한 전율 한 자락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이가 이 책을 펼칠 때마다 여기 적혀 있는 내 이름 석자 때문에 얼마나 낯설었을까? 자기 책이 아니라는 것, 남의 책을 빌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그건 도서관 이름과는 또 다른 낯설음이 아닐까? 도서관이야 당연히 책을 빌리는 곳이니 괜찮겠지만 이렇게 한 개인의 이름이 선명히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남의 책을 빌려 읽는다는 느낌,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

처음 전학을 온 후 그 아이가 몇번이나 내가 권한 책들을 읽고 돌려주러 왔었다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똑같은 책을 다시 빌려갔던 기억도. 머뭇거리며 내 책장에서 책 한권을 빼며 “저는 같은 책을 여러번 읽거든요. 이 책 한번만 더 빌려가도 되죠?”라고 말하던 아이.

나는 그때서야 아이가 왜 그렇게 책을 돌려주려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책에 적혀 있는 ‘이 책은 내 책이오’라는 그 이름 석자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 후로 책에 내 이름을 적거나 도장 찍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릴 적 책읽기의 한 즐거움으로 생긴 버릇이고 그로 인해 가졌던 기쁨이 적지 않지만 더 큰 즐거움을 위해 그것을 선뜻 포기할 수 있었다. ‘공유의 기쁨’을 위해.

“그게 니 책이었니?”

내가 읽고 있을 때는 내 책, 친구의 손에 가면 그 친구의 책, 그 친구의 옆 집 아주머니에게로 가면 그 아주머니의 책. 그렇게 내 이름 석자가 사라진 책은 우리 모두의 책이 되어 우리에게 공유의 기쁨을 더해 주리라 믿기에.

요즘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방송 준비를 위해 예전에 읽은 책이 갑자기 필요해 질 때 나는 그 책을 누구에게 주었던 가를 기억해내느라 즐거운 추억 속에 잠기고 한 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에게 그 책을 빌미로 전화해 책과 함께 친구를 만나기도 하니 이 어찌 큰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그게 니 책이었니? 그거 나도 어디 빌려줬는데 누구에게 빌려줬는지 잘 기억이 안 나네. 어쩌지?" 전화선을 타고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는 즐거움.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되어 준 책 덕분이리라. 글쎄, 그게 내 책이었나? 나도 기억이 잘 안 나네!

이영미 | 교사·<작은 친절>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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