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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철암의 희망은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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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09 00:00 수정 : 2008-11-2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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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고 폐쇄된 탄광촌 살리는 공동체 운동… 소외된 공간 자체를 관광자원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막막하고 퍽퍽한 것이 있다면 미래가 없거나 불투명할 때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꽃피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광하는지 모른다. 강원도 태백을 비롯해 정선의 사북과 고한, 삼척의 도계 지역은 석탄산업의 몰락과 함께 지역 전체가 미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곳이다. 최근 카지노 산업의 상징으로 부각된 강원랜드 때문에 경제적 생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중장기적 대안이 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강퍅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이라는 이름의 불씨를 틔우는 곳이 바로 태백시의 한 동네인 철암이다.

가장 전형적인 탄광촌이었던 철암에 새롭게 펼쳐지는 지역운동은 철저하게 ‘피폐화된 탄광촌’이라는 현실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토대에서 이뤄지고 있다. 소외와 폐쇄로 점철된 현장 그 자체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모티브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그래서 전국적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 철암동 시장상가. ‘철암공동체 운동’이 결실을 맺고 있다.

‘버려야 할 것’이 ‘보듬어야 할 것’으로

1998년부터 철암 지역에서 시작된 이른바 ‘철암공동체 운동’(<한겨레21> 2002년 8월2일치 기사 참조)이 조그만 결실을 맺었다.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벌이고 있는 철암건축도시작업팀과 광산지역사회연구소, 그린신태백21 등의 지역 시민단체가 지금까지의 활동을 총괄한 ‘철암세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낸 것이다. 보고서에는 지금까지 작지만 소중하게 전개된 철암공동체 만들기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보고서는 철암동의 역사는 물론 철암의 사회·경제·교육·문화를 꼼꼼히 살펴본 뒤 지금까지의 활동에서 확인되고 정리된 지역회생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외국의 사례를 비롯해 도시계획과 도시정비 프로그램, 바람직한 지역공동체의 모습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철암공동체 지역운동이 다른 지역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대규모 자본과 장밋빛 환상을 배격하고 지역주민들이 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지역운동의 시도는, 일찍이 유럽에서 낙후된 농촌이나 광산과 철강 지역 등에서 ‘마을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모토로 출발한 것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특히 광산이나 철강지대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주류산업이 사양산업으로 접어들면서 그 사례가 더욱 많아졌다.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된 ‘에코뮤지엄’(생태박물관) 운동이다. 농촌지역의 주거문화나 탄광지역의 생활문화가 그대로 간직된 상태에서 그것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지속 가능한 관광도 모색하고 지역경제에 활력도 가져오자는 것이다. 낙후한 탄광지역에서 이런 시도들이 많이 이뤄진 나라로는 독일이 대표적이다.

사진/ 채색과 조명등의 부분적인 손길만으로 선탄장은 전혀 다른 건축물로 보인다. 관광자원화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구 4500여명의 철암동은 지역주민 대부분이 퇴직노동자, 영세민, 독거노인들로 구성돼 있다. 집값은 비싸지만 교통과 산업입지, 주거환경은 최악이다. 과거 탄광 전성시대에는 들고 나는 인구가 3만여명 안팎이었다. 그러나 1993년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브레이크 없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철암의 지역운동은 문화운동, 교육운동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참여자들은 지역운동가들과 문화운동가, 그리고 선진적인 건축가들이다.

철암지역을 대표적인 ‘대안적 공간’으로 변화시키려는 건축가들은 건축가 주대관씨를 중심으로 뭉쳐져 있다. 이들은 지역주민들의 집을 부분적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벌여왔다. 여기에다 일종의 ‘도시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철암동의 전체적인 공간구성도 고민하고 있다. 지금은 흉물로 변했지만, 탄광지역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광업소, 저탄장, 선탄장과 사택촌(광부들의 숙소), 함바집(광부들의 식당), 선술집 등을 자연스럽게 살려놓을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이들 아이콘이 결국은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새로운 전략인 셈이다. 그래서 주민들에게도 ‘버려야 할 것’ 또는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야 할 것’이 아닌 ‘보듬어안고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물리적 토대’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교육운동도 본격화

사진/ ‘철암세상’보고서의 포스터. 이 보고서에는 지난 6년의 땀방울이 배어 있다.
지난해부터는 건축과 문화라는 분야를 넘어 새로운 차원의 교육운동도 본격화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어두워진 어른들의 얼굴을 닮아 똑같이 침울해진 아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되찾자는 뜻에서 시작됐다. 이 운동에는 “결국 아이들만이 이 지역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판단이 반영돼 있다. 이곳의 교육운동은 ‘학교 밖 대안학교’와 같은 방식이 아니다. 공교육 속에서 다양성을 찾는 노력이 중심이다. 미술교육, 건축교육 등 학교 안 특별활동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지만 확실한 것은 이 움직임이 지역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6년째 접어든 이 운동은 나름대로 결실을 맺고 ‘희망’과 ‘변화’라는 화두를 지역에 심고 있지만,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지역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대규모 개발의 압력이 가장 대표적이다. 태백시가 추진하는 4차선 포장공사의 경우 그냥 듣기에는 오히려 지역사회의 번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공사가 추진되면 광산지역의 정체성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철암 중심부를 절반 이상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철암은 우리나라 지역운동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접근과 발상법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곳이 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또 다른 번영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다. 그것이 백두대간 한 자락인 철암에서 실험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태백=글·사진 서재철 | 녹색연합 자연생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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